2026.04.25 10:43
무너진 것들의 족보
— 구조악과 한 사람의 은혜, 창세기 6:1–8 —
법과 체제가 악의 편에 설 때, 하나님은 여전히 한 사람을 찾으신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는 두 사람이 끝까지 맞선다. 한 덩이의 빵을 훔친 장발장, 그리고 그를 평생토록 추적하는 경위 자베르다.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에서 명백한 악인은 보이지 않는다. 장발장은 굶는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고, 자베르는 법에 한 치의 흠도 없이 충실한 경찰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소설을 덮고 나면 질문 하나를 오래도록 붙잡게 된다.
어떻게 성실한 사람의 성실함이, 이토록 잔인한 일이 될 수 있는가.
자베르는 악하지 않았다. 그가 지킨 법이 이미 기울어져 있었을 뿐이다. 귀족은 수만 평을 소유하고 백성은 빵 한 덩이에 무릎 꿇는 사회에서, 그 법을 충실히 집행한다는 것은 곧 그 기울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일이 된다. 악은 한 개인의 마음속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때로 악은 *법의 모양*을 하고, *제도의 얼굴*을 하고, *관습의 옷*을 입은 채 우리 곁에 조용히 앉아 있다.
창세기 6장 1절에서 8절은 바로 이 악의 진화를 그린다. 아담에서 시작된 죄는 가인의 손에서 살인이 되었고, 라멕의 입에서 복수의 노래가 되었으며, 이제 마침내 사회 전체를 삼키는 거대한 시스템이 된다. 성경은 이 지점에서 인류의 첫 번째 총체적 심판, 곧 대홍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홍수의 이유를, 오늘 우리 시대에도 서늘하게 들리는 한 단어로 지목한다.
구조악(structural evil).
창세기 3장부터 6장까지를 큰 호흡으로 읽어보면, 죄는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계단을 오르듯 진화한다. 이 진화를 따라가 보자.
아담의 죄는 아직 행위의 죄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쪼개어 스스로 판단자가 되려는 마음, 하나님 없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이었다. 선악과는 열매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이것이 원죄의 본질이다.
가인의 살인은 그 죄 된 마음이 마침내 손끝으로 흘러나온 사건이다. 하나님은 이미 경고하셨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마 5:22)로 확장하신 까닭이 여기 있다. 모든 악한 행위는 결국 악한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폭발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인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5)
라멕의 죄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살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법을 비틀어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한다. 본래 가인에게 주어진 '일곱 배'의 형벌은 끝없는 복수의 고리를 끊기 위한 *보호 장치*였다. 그런데 라멕은 이 숫자를 '칠십칠 배'로 부풀려 자기 보복의 근거로 써먹는다(창 4:24).
법이 사람을 지키는 담장에서, 사람을 치는 몽둥이로 바뀌는 첫 장면이다. 여기서부터 악은 도덕의 문제를 넘어 *법리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창세기 6장이 온다. 여기서 악은 한 개인을 넘어 하나의 체제, 하나의 문명이 된다. 법이 권력자의 손아귀에서 통치 도구로 변하고, 통치자는 스스로를 신격화하며,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로 엮어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로 굳어진다. 이것이 네피림 사건의 본질이다.
죄는 아담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가인의 *손*을 거쳐, 라멕의 *입*을 통과한 뒤, 마침내 네피림의 *체제*로 완성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2, 4)
이 짧은 본문은 성경 해석사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온 구절 중 하나다. 세 가지 전통적 해석이 내려온다.
첫째, 천사 해석.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천사들로 보는 관점이다. 유다서 6절과 베드로후서 2장 4절이 이 해석과 연결되어 왔고, 고대 유대 문헌(특히 에녹1서)이 이를 발전시켰다.
둘째, 경건한 계열과 타락한 계열의 결합 해석.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후손(경건한 계열)으로, '사람의 딸들'을 가인의 후손(세속적 계열)으로 보는 해석이다. 어거스틴 이후 루터, 칼빈, 매튜 헨리 등 개혁주의 전통이 오래도록 지지해 온 견해로, 언약 공동체가 세상과 혼합되며 타락해가는 과정을 설명한다.
셋째, 왕·통치자 해석. '하나님의 아들들'을 자신을 신격화한 고대의 왕이나 통치자로 보는 해석이다. 고대 근동에서 왕은 자주 '신의 아들'로 불렸다(시 82:6이 이 언어를 반향한다). 이 해석은 본문이 이어지는 폭력의 관영과 심판의 맥락을 가장 자연스럽게 연결해 준다.
각 해석은 저마다의 근거와 약점을 지닌다. 중요한 것은 세 해석이 모두 하나의 메시지 앞에서 수렴한다는 점이다. 창세기 6장은 하나님이 정해 두신 경계가 무너진 세계를 그린다. 하늘과 땅의 경계든, 언약 공동체와 세상의 경계든, 인간과 신의 경계든 — 마땅히 있어야 할 선이 무너지고, 인간이 자기 자리를 넘어서 *신의 자리*에 앉으려 할 때, 세상은 바로 그 무너진 경계에서부터 붕괴하기 시작한다.
'네피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나팔(נָפַל, '떨어지다', '쓰러지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 자체에 이미 '추락한 자들'이라는 뉘앙스가 배어 있다. 본문은 이들을 “용사”,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라 부른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영웅이고 왕이지만, 성경의 저울 위에서는 '떨어진 자들'이다. 그들이 세운 것은 하늘을 찌르는 문명이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무너져 내린 폐허였다.
이것이 구조악의 얼굴이다. 겉으로는 찬란하게 보이지만 속은 이미 부패한 체제. 사람들이 우러러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무너져 있는 질서. 법과 제도와 관습과 이념이 엮여 만들어내는,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
구조악의 가장 무서운 특징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악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성실한 자베르처럼.
역사는 이런 예로 가득하다.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은 오랜 세월 '열녀'로 칭송되었다. 그녀 개인의 선택이 선한가 악한가를 따지기 전에, 그런 죽음을 '미덕'으로 포장하는 사회 구조 자체가 이미 깊은 악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한 여성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남편이 아니라 그 시대의 '도덕'이었다.
어떤 이념이, 어떤 체제가, 어떤 관습이 아무리 정교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저울 위에 올려놓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연약한 자의 생명을 존중하는가, 아니면 짓밟는가. 성경의 정의는 늘 가장 낮은 자리에서 평가된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가장 자주 충돌한 대상은 개인의 죄가 아니라 바로 이 *구조악*이었다. 안식일에 병든 손을 고치신 사건(눅 6:6–11),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잡수신 일(마 12:1–8) — 이 모든 장면은 사람을 살리도록 주신 안식일 법이 어느새 사람을 억누르는 체계가 되었음을 드러낸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이 한마디 속에서 예수님은 거대한 구조악을 향해 정면으로 돌을 던지셨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는 자였으나, 사실 예수님은 율법을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로 바꾸어버린 그 *구조*에 맞서고 계셨던 것이다. 십자가는 우연한 사고가 아니다. 구조악은 자신의 본질을 폭로하는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이 짧은 구절 안에 담긴 단어들은 쉽게 읽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무겁다. 하나하나 천천히 만져보자.
'한탄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함'은 '후회하다', '유감스러워하다'라는 뜻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니, 언뜻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무지나 변덕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를 존중하시기에 인간의 선택 앞에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이다.
이 '나함'은 구약 전체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다. 금송아지 앞에서(출 32:14), 사울의 배신 앞에서(삼상 15:11), 다윗의 교만 앞에서(삼하 24:16) 하나님은 반복해서 '후회하신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가 사랑하는 이의 타락 앞에서 보이는 가장 인간적인 — 아니, 가장 신적인 — 반응이다.
'근심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차브(עָצַב)이다. 이 단어가 품은 울림은 놀랍다. 바로 이 단어가 창세기 3장에서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 타락한 여자에게 주어진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3:16)의 '수고'가 아차브이며, 타락한 남자에게 주어진 “네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3:17)의 '수고'도 바로 같은 어근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타락으로 얻게 된 그 고통을, 하나님이 지금 *똑같이* 느끼고 계신 것이다. 인간의 아픔이 하나님의 아픔이 되었다. 타락한 인간의 신음 속에 하나님의 신음이 흐르고, 출산하는 여인의 산통 속에 하나님의 산통이 겹쳐 있다.
그러니 홍수는 단순한 분노의 분출이 아니다. 홍수는 어쩌면 하나님의 눈물이었다. 사랑하는 피조물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것을 차마 더는 볼 수 없었던, 그래서 모든 것을 씻어내고 다시 시작하실 수밖에 없었던 — 그 눈물의 바다.
'쓸어버리되'로 번역된 마하(מָחָה)는 '기록에서 이름을 지우다', '도말하다'라는 뜻이다. 출애굽기 17장 14절에서 아말렉을 '도말하여' 없앨 때 쓰인 바로 그 단어다. 이것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기억에서의 말소, 역사에서의 제거다. 구조악이 세운 그 '고대의 명성'이, 하나님의 장부에서는 한 줄도 남지 않고 지워진다는 엄중한 선언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이 한 줄의 '그러나'에 성경 전체가 걸려 있다. 세상은 무너져 내렸고,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근심하시며 도말하기로 작정하셨다. 그 참혹한 문장들이 이어진 끝에, 갑자기 역설적인 접속사 하나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그러나'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온 인류가 죄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셨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은 엘리야 한 사람을, 그리고 칠천 명의 숨은 무릎을 남겨두셨다. 세상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할 때, 하나님은 마구간의 한 아기를 통해 구원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경륜은 늘 '한 사람'을 통해 움직인다. 대중의 흐름이 아니라, 시대의 권력이 아니라, 군중의 열광이 아니라 —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한 사람. 세상이 다 기울어져도, 그 한 사람이 서 있으면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신다.
노아가 얻은 '은혜'는 히브리어로 헨(חֵן)이다. 이것은 노아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상이 아니다. 본문은 노아가 의로워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고(6:8), 그 다음에 노아의 의로움이 기록된다(6:9). 은혜가 먼저다. 언제나 먼저다.
구조악이 하늘을 찌르는 시대에,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조용히 눈길을 주신다. 그 눈길이 세상을 다시 시작할 씨앗이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온 인류가 무너졌듯이(롬 5:12),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순종으로 온 인류가 다시 세워진다(롬 5:19). 성경의 구원 드라마는 언제나 '한 사람'의 문법으로 쓰인다.
창세기 6장의 이야기를 먼 옛날의 전설로 읽어서는 안 된다. 네피림은 오늘도 살아있다. 다만 그 모습이 달라졌을 뿐이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를 외치는 이 시대의 성공 신화는 고대의 네피림과 닮아있다. '능력 있는 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는 능력주의의 깃발 아래, 우리는 다른 사람을 딛고 올라서는 일을 '성실'이라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자베르의 성실함처럼, 우리의 성실함도 어쩌면 잘못 기울어진 시스템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 안에서도 구조악은 은밀히 작동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인 '선'보다 하나님의 '힘'에만 눈을 두는 신앙이 그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선한지 악한지는 묻지 않은 채, 다만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에만 집중하는 신앙. 이루어지면 '축복'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련'이라 부르는 구도.
이런 신앙에는 세 가지가 빠져 있다. *도덕성* — 선악보다 복과 화로 판단한다. *사회성* — 이웃의 고통과 무관하게 나만의 복을 구한다. *역사성* — 과거의 교훈도 미래의 책임도 없이, 오직 지금 나의 형통만 중요하다. 이것이 무속이고, 구복이며, 교회 안에 침투한 또 하나의 구조악이다.
가장 가까운 자리로 내려와 보자. 부당한 관행이 반복되는 회사에서, 약자를 조롱하는 단체 대화방에서, 누군가의 상처를 '재미'로 소비하는 SNS에서 —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네피림을 만난다. 그곳에서 침묵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그 구조의 편에 서는 일이다. 반대로, 한마디의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 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 한 번의 '아니요'를 말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노아 되기'다.
창세기 6장을 덮으면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 앞에 선다.
첫째, *나는 어떤 구조 안에 살고 있는가.* 그 구조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어떻게 빚어내고 있는가.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가운데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은, 누군가의 눈물 위에 세워진 것은 없는가.
둘째, *나는 오늘의 노아가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한 사람이 세상을 다시 시작하는 자리가 된다. 그 한 사람은 어쩌면 내가, 그리고 당신이다.
네피림이 하늘을 찌르던 시대에 하나님은 노아 한 사람을 보셨다. 로마 제국이 세상을 호령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갈릴리의 한 청년을 보내셨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은 여전히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고, 유명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기울어진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는 한 사람. 구조악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걸으려는 한 사람.
홍수는 모든 것을 쓸어버렸지만, '그러나 노아는' 그 물 위를 떠올랐다. 당신의 삶에도 홍수의 시대가 있을 것이다. 그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오늘도 조용히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노아가 되어라.
이 기울어진 세상 한가운데서,
내 은혜를 입은 한 사람으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또 하나의 창조를 시작하거라.
— 무너진 것들의 족보 한가운데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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