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간 흙을 빛으로 빚으시는 하나님

— 창세기 1:1~2:25의 창조신앙이 우리에게 묻는 것 —

 

 

서론  |  금이 간 찻잔을 버리지 마십시오

일본에 ‘킨츠기’(金継ぎ)라는 고대 공예 기법이 있다. 깨진 도자기를 버리지 않고, 깨어진 자리를 금으로 이어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금으로 수리된 그릇은 원래의 멋들어진 찻잔보다 더 값지고 아름답게 바뀐다. 깨진 흔적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되는 역설. 그 깨어짐 자체가 물건의 역사가 되고, 새로운 아름다움의 원천이 된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실직, 실패, 상처, 관계의 파탄……. 삶을 살다 보면 우리 모두는 한 번쯤은 깊이 금이 간 찻잔처럼 무력하게 주저앉는 날을 경험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 ‘이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회의감.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묻는다. “이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가?”

창세기 1장부터 2장까지의 창조 이야기는, 바로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이 본문은 ‘우주가 언제 생겼는가’라는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글이 아니다. 절망과 혼돈 속에 있는 오늘, 이 자리, 우리 각자를 향한 메시지이다. 금이 간 흠을 빛으로 빚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본론 1  |  태초의 빛, 영원의 깊이

‘태초’는 시계가 시작된 순간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성경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은 우주가 시작된 물리적 첫 순간을 떠올린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의 ‘베레쉬트’(bereshith)라는 단어는 단순히 시계의 첫 눈금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단어는 무시간적이고 초월적인 깊이를 품고 있다. 존재의 근원, 모든 것의 본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헬라어로 번역된 칠십인역(LXX)에서는 이를 ‘엔 아르케’(ἐν ἀρχῇ), 즉 ‘근본, 영원부터’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준다. 창조란 먼 옛날에 한 번 일어난 고대의 사건이 아니다. 창조는 ‘오늘’로부터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창조하고 계신다. 당신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계신다. ‘태초’는 과거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손을 대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무질서의 극복이다

‘창조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바라’(bara)는 어떤 재료도 사용하지 않은 창조를 의미한다. 여기서 기독교 교리인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등장했다. 그러나 여기서 ‘무’란 단순히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거기에는 이미 땅이 있고, 어둠이 있고, 물이 있다. 그렇다면 이 ‘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질서, 절망, 무법의 상황을 가리킨다.

“어둠이 깊은 물 위에”의 ‘깊은’은 히브리어로 ‘테홀’(Tehom)인데, 이것은 법적인 용어로 법이 없는 상태, 즉 무법의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 삶의 어떤 순간이 그렇지 않은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삶의 규칙이 붕괴되고, 암흑 속에서 방향을 잃은 순간. 창조신앙은 바로 그 ‘무’의 극복이다. 하나님은 무질서를 질서로, 절망을 희망으로, 환난을 영광으로 변화시키신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도 살아남은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말했다.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디어 낼 수 있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라고 보았다. 창세기의 창조 신앙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하나님은 의미를 창조하신다. 그분이 빛을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의 어둠 속에서도 의미를 불러일으키신다.

본론 2  |  말씀으로 빚는 세계, 보이지 않는 것의 힘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1:3, 6, 9, 14, 20, 24). 그런데 여기서 말씀은 도깨비 방망이 같은 마술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꿈이며 계획이며 약속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만든다.

비행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비행기가 만들어지는 첫 시작은 보이는 물질이 아니다. 보다 빨리, 높이 날고자 하는 인간의 꿈이 만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창조했다. ‘무로부터의 창조’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말씀이 보이는 삶이 되는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이 말씀은 동시에 무질서와 절망의 극복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1:2)을 돌파하는 힘이다. 성경은 그 말씀이 병든 인간을 치유한다고 증거한다. 죄에 무디어진 사람, 앞과 삶이 일치되지 못하는 사람, 세속적 삶에 갇혀, 병들어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이 치유한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 8:8). 이 백부장의 고백은 창조신앙의 핵심을 꿰뚫는 말이다.

본론 3  |  조화의 창조, 대립을 넘어 하나로

짝을 지어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의 ‘천지’는 히브리 원문에서 한 단어가 아니다. ‘하늘과 땅’, 두 개의 명사이다. 그리고 이 둘은 대립이 아니라 조화로 이루어진 쌍이다. 6일 동안의 창조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둘씩 짝을 지어 창조하셨다.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바다와 땅, 해와 달, 새와 물고기, 동물과 사람, 남자와 여자. 이 모든 짝들이 갈등이 아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창조 이야기의 핵심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1:4, 10, 13, 18, 22, 25, 31). 여기서 ‘좋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tob)인데, 이것은 단순히 정서적으로 기분이 좋다는 말이 아니다. ‘선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선’은 상대적 선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절대적 선이다. 비교와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 좋은 것.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의 모습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경고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싶어하는 깊은 충동이 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2:9)는 바로 이 위험을 경고한다. 여기서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도덕적 판단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건과 사물을 선과 악이라는 이원적 시선으로 보려는 태도, 비교와 차별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인간의 죄 된 심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은 이 ‘구별 짓기’로 가득하다. 누가 더 잘하나, 누가 더 가졌나,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이 비교의 시선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비교하여 빛이 우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밤과 낮을 비교하여 낮이 더 가치 있다고 하지 않으셨다. 둘 다 있는 그대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죄’란 분리이고 대립이고 갈등이다. 이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창조신앙이다.

저녁이 있어 아침이 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1:5, 8, 13, 19, 23, 31). 이 문장은 단순히 하루의 시간 경과를 알리는 말이 아니다. 고난의 밤에서 소망의 아침으로 가는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려는 것이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워 온다. 저녁이 있어 아침이 있다. 고난이 있어 영광이 있다.

어둠의 시간을 건너고 있는 사람에게, 창세기는 말한다. 당신의 저녁은 아침을 위한 준비라고. 하나님은 저녁을 건너뛰어 아침을 여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창조는 언제나 어둠을 뚫고 빛을 향해 나아간다.

본론 4  |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존재

흙의 티끌과 하나님의 입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26). 여기서 ‘형상’은 라틴어로 ‘이마고 데이’(Imago Dei)이다. 이것은 외모가 같다는 말이 아니다. 본질이 같다는 말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의 형상’이라는 칭호를 오직 왕에게만 붙였다. 그런데 창세기는 이것을 인간 일반에게 붙인다. 이것은 성경의 혁명적 사고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이며, 왕권이 상속된 존재이다.

인간 창조의 과정은 더욱 감동적이다. 하나님은 땅의 흙, 그것도 미세한 가루처럼 고운 흙, 즉,먼지로 사람을 빚으셨다. 학자들은 ‘지으시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차르’가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어 토기를 만드는 장면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라고 설명한다. 우주를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빚을 때만큼은 손수 지어 물레를 돌리셨다. 그리고 그 흙으로 빚은 형상에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으셨다.

사람이 받은 숨(생기)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신성한 것이다. 흙의 티끌과 하나님의 입김, 이 둘이 하나가 되어 ‘살아 있는 존재’(네피쉬 하야)가 되었다. 인간은 흙이면서 동시에 신성한 존재이다. 유한하면서 무한을 품은 존재이다. 자연과의 조화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도 있는 통전적 존재이다.

함께함을 위해 창조된 존재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하셨다. 고대인들에게 갈빗대는 생명의 핵을 상징했다. 여자의 창조에 인간의 개입이 배제된 것은, 창조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임을 보여준다.

‘돕는 배필’(2:20)의 히브리어 ‘에제르 크네그도’는 흥미로운 표현이다. ‘에제르’는 단순한 조수의 도움이 아니라, 성경에서 신적인 도움을 말할 때만 쓰인다. ‘위험으로부터 구하다’,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크네그도’는 ‘대등한’, ‘동등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돕는 배필’은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서 도와주고 지탱해주는 동반자를 의미한다. 외로움의 위험으로부터 구해내는 구원자를 의미한다.

“부모를 떠나”(2:24)라는 말씀도 주목할 만하다.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전제한다. 각기 다른 관습과 문화를 떠나, 받기만 하던 관계에서 나누고 서로 가르쳐주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연합하다’는 히브리어 ‘다바크’는 결혼이 하나의 계약관계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계약을 지켜야 할 책임이 함께한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책임이고, 헌신이고, 선택이다.

본론 5  |  두 창조 이야기, 하나의 신앙고백

창세기에는 두 가지 창조 이야기가 있다. 1:1 이하의 창조와 2:4 이하의 창조이다. 하나는 물이 넘치는 혼돈의 상황에서, 다른 하나는 물이 없는 가뭄의 상황에서 시작된다. 배경도 다르고,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도 다르고, 창조의 방법도 다르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1:1~2:3)는 기원전 587년 바벨론 포로기의 산물이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범람 지역에서, 모든 것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이 혼란한 질서를 잡으며 외치는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이 창조는 장엄하고, 반복적이며, 도식적이다. 외면적 질서와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2:4~25)는 기원전 850년경, 이스라엘이 분단되고 타락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여기서는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토기를 빚듯 정성으로 인간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내면적 모습이 더욱 강조된다. 인간의 내면을 담으려는 하나님의 정성,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집어넣으려는 모습이 보인다.

두 창조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세상은 그분의 의도와 계획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가장 가치 있는 피조물이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다. 홍수이건 가뭄이건, 배고픔과 직결된 절망적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신앙으로 그 고난을 극복했다. 창조 ‘사건’이 아니라 창조 ‘신앙’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문  |  당신의 혼돈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킨츠기 장인은 깨진 도자기를 버리지 않는다. 끊어진 자리에 금을 바르고, 인내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탄생시킨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다. 흙의 티끌로 사람을 빚으시고,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으시고, 그 창조물을 ‘보시기에 좋다’고 선언하신다. 비교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시기에 좋다’고.

창세기의 창조 신앙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어둠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성경은 항상 오늘 나를 향해 증거한다. 오늘의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어둠을 극복케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고백할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당신의 혼돈이 무엇이든, 당신의 절망이 얼마나 깊든, 하나님은 저녁을 건너, 아침을 여시는 분이시다. 무질서를 질서로, 어둠을 빛으로, 깨진 것을 금으로 이어서, 다시 빚으시는 분이시다. 지금 이 순간, 그분은 당신의 삶 위에 손을 얹고 계신다. 흙의 티끌 같은 당신을 보시며, 오늘도 말씀하고 계신다.

“보기에 좋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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