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2 18:44
태초의 산통, 창조의 자궁
— 창세기가 말하는 하나님의 모성과 사람을 향한 목적 —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사람에 대해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이름을 짓는데, 그 이름에는 기도와 간절함, 가족의 역사와 소망이 압축되어 담긴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질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성경의 첫 번째 책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창세기’라고 부르는 이 책, 영어로는 Genesis라고 불리는 이 책의 이름 속에는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마음이 숨겨져 있다. 이번 장에서는 창세기라는 책의 이름과 구조, 그리고 그것이 형성된 과정을 살펴보면서,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을 비추는 빛을 발견해 보려 한다.
혹시 당신은 삶이 버겁고, 이 세상이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지 않은가. 그럴 때 창세기는 말한다. 당신이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하나님이 산통의 고통을 감당하면서까지 빚어낸 세상의 한 부분이라고. 그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 보자.
창세기의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제목이 없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책의 첫 단어를 그대로 제목으로 삼았는데, 창세기의 경우 그것이 바로 히브리어 ‘베레쉬트’(בְּרֵאשִׁית, bereshith)였다. ‘태초에’라고 번역되었지만 히브리어 단어의 본 뜻은 ‘근본’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상대적인 시간적 개념이 아닌 절대적인 모든 것의 ‘본질’, ‘뿌리’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생각해 보면, 한 권의 책을 그 첫 단어로 부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소설의 첫 문장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듯, ‘베레쉬트’라는 단어 하나가 창세기 전체의 주제와 방향을 압축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은 ‘본질’, ‘근본’임을 말한다.
영어 Genesis는 칠십인역(LXX)의 그리스어 γένεσις(게네시스)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기원’, ‘시작’, ‘창조’ 등을 뜻하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단어의 뿌리이다. 게네시스와 어원이 같은 γέννησις(게네시스)라는 말은 ‘출생’을 뜻하며, 그 동사형 γεννάω (겐나오)는 ‘낳다’라는 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세상을 ‘낳으셨다’는 것은, 창조가 마치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는 것처럼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이 되는 과정에는 해산의 고통이 있었다. 한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 산통의 고통을 감당하듯, 하나님도 세상을 그렇게 ‘낳으셨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귀에 이것은 낯설게 들릴 수 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루시는 절대적 힘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의 근원에 무한한 힘만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의 아픔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통찰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자.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 샤따이’(El Shaddai)라고 한다. 여기서 ‘엘’(엘)은 ‘강한 자’, ‘능한 자’를 뜻하고, ‘샤따이’의 어근인 ‘샤드’(shad)는 놀랍게도 ‘어머니의 젖가슴’을 뜻한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 속에는 강력한 힘만이 아니라, 젖을 먹이는 어머니처럼 자녀를 품어 길러내시는 따뜻한 모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긍휼하신 하나님’을 말하는 히브리어 ‘라훈’(Rahum)은 여인의 자궁을 뜻하는 ‘레헴’(Rehem)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추상적인 동정이 아니라, 자궁 속에서 생명을 품고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체험적이고 헌신적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유희가 아니다. 창조의 근원에 ‘해산의 고통’이 있었다는 통찰은, 그 창조가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태초에 산통으로 세상을 ‘낳으신’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신’ 것이다.
"여자가 어찌 그 젖 먹는 아이를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겠다" (이사야 49:15)
창세기는 일정한 문학적 틀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이 히브리어로 ‘엘레 톨레도트’ 구문이다. ‘엘레’는 ‘이것들’, ‘톨레도트’는 ‘후예’, ‘세대’, ‘역사’, ‘가족사’ 등을 뜻하며, "이것은 ∼의 역사이다" 혹은 "이것은 ∼의 후예이다"라고 번역된다. 흥미로운 것은 ‘톨레도트’의 동사형인 ‘얘라드’가 ‘출산하다’ 혹은 ‘아버지가 되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결국 ‘누군가를 낳는 것’인 셈이다.
창세기에는 이 ‘엘레 톨레도트’ 구문이 열 번 등장하며,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수직적 계보로, 아담의 계보나 셀의 후예처럼 매 세대마다 한 명의 계승자를 따라가다 마지막에 세 명의 아들 이름을 나열한다. 둘째는 수평적 계보로, 노아의 아들들의 후예나 이스마엘, 에서의 대략처럼 한 세대에 여러 자녀와 그 후손까지 언급한다. 셋째는 이야기 형태로, 창조 이야기, 홍수 이야기,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가 이에 해당한다.
창세기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말하면서도 왜 이렇게 대부분 사람의 족보와 사람의 삶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은 그 뜻을 반드시 사람을 통해 펼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다른 눈으로 보게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펼치시는 방식이 ‘사람을 통해서’라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이 하나님의 이야기의 한 페이지라는 의미이다. 조용히 회사에 출근하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도하는 당신의 평범한 하루가, 하나님이 쓰시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인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 《독서하는 철학자》를 떠올려 보자. 어둠 속에서 책을 읽는 하나의 인물에게 빛이 쏟아진다. 그 빛은 책에서 나온다. 창세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빛이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쏟아지는 것이다.
창세기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책이 아니다. 기원전 1800년경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들이, 시대의 변화와 역사의 고비를 거치며 해석되고 재해석되어 문서화되기까지 수천 년의 여정을 거쳤다.
마치 한 아버지가 자녀에게 들려주던 이야기가, 그 자녀가 또 자신의 아이에게 들려주고, 세대를 거치며 점점 더 풍성해져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된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가 관념적 신학의 산물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빚어진 신앙 고백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성경학자들은 창세기가 적어도 네 가지 전승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발견했다.
첫째는 야훼 문서(J)로, 기원전 10세기 다윗-솔로몬 시대에 유다 지파에서 쓰여졌다. 이 문서는 하나님을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생동하게 묘사하며, 약속과 성취, 형제 간의 갈등, 동생의 승리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통일왕국의 번영 속에서도 인간의 교만과 무절제를 경고하는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다.
둘째는 엘로힘 문서(E)로, 북이스라엘에서 기원전 9세기에 기록되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꿈이나 천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며, 신앙의 순수성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복종을 강조한다.
셋째는 제사장 문서(P)로, 바빌론 포로 시대인 기원전 6세기에 쓰여졌다. 조국을 잃고 포로의 땅에서 살아가던 제사장들이 기록한 이 문서는, 하나님을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하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복의 불변성을 강조한다.
마침내 기원전 450년경, 이 모든 문서가 편집되어 오늘 우리가 읽는 창세기가 완성되었다.
이 형성 과정이 주는 깊은 통찰이 있다. 비유하자면 창세기는 하나의 악기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와 같다. 야훼 문서는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노래하고, 엘로힘 문서는 그분의 초월적 거룩함을 연주하며, 제사장 문서는 약속의 확실성을 반복한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장소, 다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창세기라는 교향곡이 된 것이다.
번영의 시대에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과, 포로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은 사람의 목소리가 함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은 인생의 어떤 조건에서든 만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재정이 풍족할 때든, 삶이 무너졌을 때든, 그분은 항상 거기 계신다.
창세기는 먼 옛날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쓰여지고 있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게네시스’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을 ‘낳으셔서’ 해산의 고통을 감당하셨다. ‘엘 샤따이’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그 전능함의 본질은 힘이 아니라 모성이었다. 그리고 ‘톨레도트’라는 구조가 보여주듯,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이루신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도 하나님이 쓰고 계신 ‘톨레도트’의 한 페이지가 아닌가. 당신이 격고 있는 고통, 당신이 흘리고 있는 눈물, 당신이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오늘 하루가, 하나님이 산통의 사랑으로 빚어내고 계신 새로운 창조의 현장이다.
범영 속에서든, 포로 속에서든 창세기를 기록한 수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도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조용히 눈을 감고 묻어보자.
‘하나님, 당신이 해산의 고통으로 저를 빚어내셨다면, 오늘 제 삶의 이 고통도 당신이 무언가를 낳으시는 과정인 것입니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창세기가 수천 년에 걸쳐 조용히 들려주고 있다.
‘그렇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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