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고, 죽고, 그리고 걷다

— 또 다른 창조, 창세기 5:1–32 —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 한가운데서, 삶의 질을 묻는 한 사람의 이야기

 

1. 이력서 한 장에 담기지 않는 것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요약할 때 습관처럼 숫자를 나열한다. 몇 년에 태어났고, 어디서 공부했고, 언제 결혼했으며, 어떤 직함을 달았는지. 이력서 한 장이면 한 사람의 일생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전부일까. 숫자와 사건의 나열 너머, 그 사람이 어떤 눈빛으로 아침을 맞이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건넜는지, 우리는 좀처럼 알 수 없다.

창세기 5장을 처음 펼치면 당혹스러움이 밀려온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름과 숫자, 그리고 한결같은 결말 — “그리고 그는 죽었더라.” 이 족보를 읽는 일은 무한히 되감기는 시계를 바라보는 것과 닮았다. 태어나고, 자식을 낳고, 죽는다. 태어나고, 자식을 낳고, 죽는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전부란 말인가.

그러나 바로 그 단조로운 반복 속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뜻밖의 질문 하나를 조용히 밀어낸다.

“당신은 지금, 어떻게 걷고 있는가?”

 

2. 또 다른 창조 — 죽음의 책 속에 숨은 생명의 노래

창세기 5장은 단순한 족보가 아니다. 본문은 “이것이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라(זֶה סֵפֶר תּוֹלְדֹת אָדָם)”(5:1)로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이어지는 1절 하반절과 2절은 창세기 1장 27–28절의 창조 기사를 거의 그대로 되울린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며, 복을 주시고 이름을 ‘사람(아담)’이라 부르셨다는 문장이 다시 등장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족보를 쓰기 전에 창조 기사를 한 번 더 읊조리는 것 — 그것은 이 이후에 이어지는 생명의 대물림 전체를 또 하나의 창조로 읽으라는 저자의 선언이다. 세대마다 태어나는 아이 하나하나는 단지 남녀의 생물학적 결합의 결과가 아니다. 그 아이들은 매 세대 하나님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창조물이며, 태초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메아리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은 죽음의 목록이자 동시에 창조의 연대기다. 죽음이 반복되는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는 끊이지 않는다. 이 족보의 진짜 주제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3. ‘죽었더라’의 장중한 울림

5장의 족보는 일정한 틀을 따른다.

A는 X세에 B를 낳았고, B를 낳은 후 Y년을 더 살며 자녀를 낳았으며, A는 합하여 얼마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이 패턴이 아담에서 노아까지 열 세대에 걸쳐 반복된다. 읽다 보면 리듬이 생기고, 그 리듬은 점점 장중한 장송곡처럼 들린다. 태어나고, 살고, 죽었더라. 태어나고, 살고, 죽었더라.

그러나 이 반복이 말하려는 바는 삶이 ‘그저 그렇다’는 허무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한 세대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이 다시 자식을 낳았다. 죽음조차 생명의 흐름을 끊지 못한다. 한 사람의 삶은 다음 세대의 어깨 위에서 계속 이어진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내리는 선택과 품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다음 세대의 족보에 기록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묵직한 책임을 지운다. 우리는 언젠가 ‘죽었더라’로 마감될 한 줄의 기록 앞에서, 그 한 줄 앞에 어떤 문장을 남길 것인지를 매일 쓰고 있는 셈이다.

장수의 숫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아담 930세, 므두셀라 969세. 이 장수를 오늘의 생리학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공기가 더 깨끗해서, 죄가 덜해서라는 식의 설명은 본문의 의도를 비껴간다.

흥미롭게도 고대 수메르의 왕 목록에는 대홍수 이전 왕들이 수만 년을 통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룰림 왕 28,800년, 알랄가르 왕 36,000년. 창세기의 숫자는 이 고대 근동의 장대한 수치들에 비하면 훨씬 절제된 편이다. 성경은 이 장수에 신격적 함의를 부여하지도, 영웅화하지도 않는다. 다만 생명에 대한 풍요와 창조주의 축복이라는 메시지를 이 숫자들을 통해 말없이 전한다. 결국 이들도 죽었다. 아무리 길어도, 생명의 기원이자 주인이신 하나님 없이는 그 길이가 영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이 족보는 조용히 증언한다.

 

4. ‘바라크’ — 복은 무릎에서 시작된다

5장 1–2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복을 주셨다.” 이 ‘복’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바라크(בָּרַךְ) 이다.

이 어근은 기본형(칼형)에서는 ‘무릎을 꿇다’를 뜻한다. 시편 95편 6절에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고 외칠 때 쓰이는 바로 그 단어다. 그리고 같은 어근의 강의형(피엘형)이 ‘축복하다’로 쓰인다.

이 어원의 결을 따라가면 한 가지 울림이 남는다. 축복은 무릎에서 자라난다는 것. 히브리 사람들의 언어적 직관 속에서 ‘복’은 고개를 뻣뻣이 든 자의 것이 아니라, 무릎을 굽힌 자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복이란 물질적 풍요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편안한 삶의 포장지도 아니다. 복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자세, 바로 그 겸손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은혜의 열매다. 우리가 그토록 구하는 복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꺼리는 그 자세 — 무릎을 꿇는 일 — 속에 숨어 있다.

 

5. 두 형상 사이에서 — 아담이 낳은 셋

“아담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5:3).

이 한 구절은 표면적으로는 자식이 아비를 닮았다는 평범한 진술이지만, 그 이면에는 묵직한 신학이 흐른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5장 3절에서는 아담이 자기의 형상대로 아들을 낳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복제된 것이 아니다. 타락 이후의 아담, 죄가 스며든 아담이 자기 결을 자식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형상이 지워진 것은 아니다. 창세기 9장 6절과 야고보서 3장 9절은 타락 이후에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다만 그 형상은 이제 손상된 채로, 죄의 그림자와 겹쳐진 채로 이어진다.

우리 안에는 두 형상이 공존한다.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씨앗, 그리고 죄를 향해 기울어지는 본능.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우리는 이 두 형상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에서 말했던 ‘값비싼 은혜’는 이 긴장을 가장 정직하게 살아내는 길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종교적 가면을 쓰는 일이 아니라, 일상 한가운데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걸어내는 일이다.

이름에 새겨진 죄의 그림자, 그리고 은혜의 반짝임

셋의 후손들의 이름 속에는 인간 역사의 음영이 조용히 각인되어 있다. 게난(קֵינָן)은 ‘소유’나 ‘창을 가진 자’ 정도의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가인(קַיִן)과 같은 어근을 공유한다. 생존을 위한 획득과 경쟁, 그 이면에 깔린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이 이름 한 자락에 스민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마할랄렐(מַהֲלַלְאֵל)의 뜻은 “하나님을 찬양함”이다. 죄의 어두움 속에서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름 하나가 족보 한가운데 놓이는 것이다.

이 흐름 위에 바울의 고백이 겹쳐진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족보는 단지 죄의 계보만도 아니고, 단지 은혜의 계보만도 아니다. 그것은 죄와 은혜가 얽혀 흐르는, 그러나 결국 은혜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는 하나님의 긴 문장이다.

 

6. 걷는 사람, 에녹

창세기 5장의 단조로운 장송곡 — “낳고, 살고, 죽었더라” — 이 갑자기 끊어지는 순간이 있다. 에녹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5:24)

죽음의 행진곡 한가운데에 갑자기 다른 선율이 흐른다. ‘죽었더라’가 아니라 ‘있지 아니하였더라(אֵינֶנּוּ).’ 이 한 줄이 족보 전체를 뒤흔든다.

‘동행’의 히브리어 — 함께 걷는다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표현은 한 사람에 대해 두 번 반복된다(5:22, 24). 히브리어로는 히트할레크 엣-하엘로힘(הִתְהַלֵּךְ אֶת־הָאֱלֹהִים) 이다. 동사 ‘할라크(걷다)’의 재귀형/반복형인 ‘히트할레크’는 ‘이리저리 함께 걷다’, ‘지속적으로 동행하다’라는 뉘앙스를 품는다.

이 단어는 나중에 노아(6:9)에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17:1) 다시 쓰인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3장 8절에서는 에덴동산을 거니시던 하나님에게도 같은 동사가 쓰인다. 그러니까 ‘동행’이란, 잃어버린 에덴의 그 산책을 이 땅에서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과 나란히 걷기를 원하신다. 에녹은 그 잃어버린 산책로를 찾아낸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 교제한다’, ‘하나님을 만난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말을 쉽게 사용한다. 이 말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어느 날 꿈속에서 환상 중에 신비한 존재를 만났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깨달음’이며, 그 깨달음에 따른 삶의 변화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쳤을 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우리가 그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그 ‘만남’은 황홀한 환시가 아니었다. 눈이 열리는 깨달음이었고, 발걸음의 방향이 바뀌는 전환점이었다. 만남은 언제나 삶의 자세를 바꾼다. 바뀌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직 만남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 속의 동행

에녹의 동행은 영웅적인 업적이 아니었다. 본문은 그의 기적도, 환상도, 특별한 선언도 기록하지 않는다. 그는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다. 그뿐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자고, 일하고, 가족을 돌보았다. 오직 하나가 달랐다. 그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것.

경건이란 하나님처럼 사는 것, 곧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지, 어떤 특별한 일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용히 자문하게 된다. 우리가 “만났다”고 말하는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일상을 실제로 걷고 계신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우리의 하루 속에 그분과 나란히 찍힌 발자국이 있는가.

365 — 완전함의 상징

에녹은 이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짧은 365세를 살았다. 므두셀라의 969세, 아담의 930세에 비하면 눈에 띄게 짧다. 그러나 성경은 이 짧은 생애를 결코 불행으로 그리지 않는다. 장수가 축복이 아니다. 성경은 여기서 삶의 양이 아니라 질을 묻는다.

전통적으로 유대 해석자들은 에녹의 365년을 태양년의 날 수와 겹쳐 읽어왔다. 빈틈없이 하루하루가 채워진, 한 해의 원이 완전히 닫히듯 완성된 삶이라는 상징이다. 역사적 과학적 일치를 주장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숫자가 주는 울림만은 분명하다. 에녹의 생애는 짧았지만 완전했다.

우리가 ‘100세 시대’를 논하고 수명 연장의 기술에 열광하는 이 시대에, 성경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살았는가.

빅토르 프랑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극한을 기록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지만, 의미를 잃은 사람은 풍요 속에서도 무너진다고. 에녹의 365년이 그랬다. 하나님과 함께 걸었기에, 짧은 생애의 하루하루가 영원을 품고 있었다.

죽음 너머의 문

에녹의 마지막은 독특하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히브리서 11장 5절은 이를 “믿음으로 옮겨져 죽음을 보지 않았다”고 해석한다. 열왕기하 2장에서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올라간 장면과 나란히 놓이는 순간이다.

죽음이 모든 것의 종착역이라는 시대의 상식에 에녹의 생애는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리고 그는 죽었더라” — 이 반복이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 될 수 없다는 선언이, 에녹 한 사람을 통해 울려 퍼진다. 죽음의 목록 한가운데 놓인 이 예외적인 한 줄은, 먼 훗날 부활의 아침을 예고하는 첫 번째 각주와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의 희미한 실루엣이, 이 고대의 족보 속에서 이미 어른거리고 있다.

 

7. 심판 너머의 안식 — 노아를 향하여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로 풀이되어 왔다. 하나는 ‘창을 던지는 자’, 다른 하나는 ‘그가 죽으면 보내심이 임하리라’. 두 해석 모두 시대의 어둠을 암시한다. 인간의 폭력이 퍼지는 시대, 그리고 그 폭력 끝에 임할 심판.

실제로 므두셀라의 수명 969년을 따라가면, 그가 죽은 해와 대홍수가 임한 해가 맞물린다. 족보 안에 이미 시계 바늘이 숨겨져 있었던 셈이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이 969세를 살았다 하나, 그것조차 심판의 때 앞에서는 유예된 한 뼘의 시간일 뿐이다.

그리고 라멕이 한 아들을 낳는다. 그는 아이의 이름을 노아(נֹחַ) 라 지었다. ‘쉼’, ‘안식’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붙였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5:29)

저주받은 땅 위에서 땀 흘리며 수고하는 삶의 고단함, 그 한가운데서 아버지 라멕이 갓 태어난 아들에게 건 소망이 이 한 문장에 응축되어 있다.

라멕은 에녹의 손자다. 에녹과 100년 넘게 함께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평생 지켜본 사람이다. 에녹처럼 살고 싶었으나 그렇게 살아내지 못했던 자신의 삶, 그 미완의 부끄러움이 ‘노아’라는 이름 속에 녹아 있다. 나는 수고롭게 살다 죽겠지만, 이 아이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안식이 임하기를. 이 기도가 족보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타오른다.

이 족보의 또 다른 독특한 점은, 다른 족보와 달리 노아의 세 아들 — 셈, 함, 야벳 — 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열거된다는 것이다. 심판의 홍수 이후 이 세 사람으로부터 새롭게 퍼져나갈 세상이 암시된다. 셈(שֵׁם)은 ‘이름’ 혹은 ‘명성’으로, 아브라함과 메시아의 계보로 이어진다. 함(חָם)은 ‘뜨거움’이며, 야벳(יֶפֶת)은 ‘확장’이다. 파괴 뒤에 펼쳐질 새로운 창조의 지도가 이 세 이름 위에 조용히 그려진다.

창세기 5장은 그래서 죽음의 책이자 생명의 책이고, 심판의 예고이자 안식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역사하신다. 이 족보는 죄의 족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버리지 않고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증언이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보인다.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사람을 위한 이야기다.

 

8. 오늘, 누구와 걷고 있습니까

창세기 5장의 족보를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 한 가지 질문이 마음에 고요히 내려앉는다.

나의 족보에는 무엇이 기록될 것인가.

우리 대부분의 삶은 아마 이 족보의 일반적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태어나고, 일하고, 가정을 이루고, 나이 들고, 떠난다. 그것이 삶의 외형이라면, 삶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아담의 다른 후손들처럼 “살고 죽었더라”로 요약될 것인가, 아니면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는 한 줄이 조용히 남겨질 것인가.

에녹의 동행은 거창하지 않았다. 그는 자녀를 낳고 기르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 동행이란 일상을 버리고 광야로 떠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 출근길 지하철의 흔들림 속에서, 아이의 숙제를 돕는 저녁 식탁에서, 마감에 쫓기는 사무실 책상 앞에서, 애써 미소 짓는 모임의 한쪽 구석에서 —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딛는 일이다.

그 ‘깨달음’이 삶을 바꾼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번개 치는 순간의 황홀경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눈이 열려가는 과정이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게 되고, 조금 더 정직해지며, 조금 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동행의 얼굴이다.

‘바라크’ — 복은 무릎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오늘 하루, 잠시 멈추어 무릎을 굽혀보면 어떨까. 빠르게 달려가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하나님 앞에 나를 내려놓는 그 순간에서 우리의 또 다른 창조가 시작된다.

 

낳고, 죽고, 그리고 걷다.

 

죽음의 족보 한가운데에서

하나님과 걸었던 한 사람의 발자국이

오늘 나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누구와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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