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8 21:14
새벽과 그림자 사이에서
— 인간이라는 모순된 존재에 대하여 —
창세기 4장 17-26절,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탄생
“아다여,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 창세기 4:23
우리 안에는 새벽의 여명과 어둠의 그늘이 함께 산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셋'을 세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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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두 얼굴의 사람
우리는 모두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산다. 아침이면 출근길에 밝은 미소를 짓고, 저녁이면 집 안에서 지친 얼굴로 소파에 쓰러진다. 교회에서는 경건한 찬양을 부르고, 주차장에서는 새치기한 차를 향해 경적을 울린다. 회의실에서는 '상생'을 말하고, 뒤돌아서서는 경쟁자의 약점을 계산한다.
이것은 위선이라기보다 인간의 조건이다. 우리 안에는 아름다운 것을 향한 열망과 폭력적인 것을 향한 충동이 기묘하게 공존한다. 음악을 사랑하면서도 무기를 만드는 존재, 시를 쓰면서도 복수를 노래하는 존재 — 그것이 인간이다.
창세기 4장 17-26절은 바로 이 인간의 이중성을 놀랍도록 정밀하게 해부한다. 가인의 후손 라멕의 두 아내 — '새벽의 여명'이라는 뜻의 아다와 '어둠의 그늘'이라는 뜻의 씰라. 이 두 여인은 단순히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살고 있는 두 자아의 초상이다. 흔히 설교에서 건너뛰기 쉬운 이 족보 본문 안에, 인류의 문명이 어떻게 탄생하고 타락하며, 그럼에도 하나님이 어떻게 새 역사를 시작하시는지에 대한 놀라운 드라마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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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을 쌓는 인간, 떠돌라시는 하나님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4:17)
가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벌은 '떠돌라'는 것이었다[1].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2). 그런데 가인은 이 명령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떠도는 대신 성을 쌓는다. 그것도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성 이름을 짓는다. 자신과 자신의 핏줄을 위한 영구적인 보호처 — 그것이 가인이 원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다. 인간은 '안전'이라는 이름의 성을 쌓으며, 하나님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숨긴다. 벽을 높이 쌓을수록 마음은 더 외로워지고, 성문을 두꺼이 만들수록 이웃과의 거리는 멀어진다. 가인의 성은 그의 죄의 기념비였다. '나는 떠돌지 않겠다'는 선언. '나는 내 힘으로 살겠다'는 고집.
이것은 후에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2]. 가인은 하나님이 '떠나라' 하셨을 때 성을 쌓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떠나라' 하셨을 때 떠났다. 같은 명령 앞에서 갈라지는 두 인생 — 하나는 자기 안전의 성벽을 높이 쌓았고, 다른 하나는 약속만 믿고 길을 떠났다. 가인의 떠돌이는 심판 아래의 상실이고, 아브라함의 떠남은 부르심 아래의 순례다. 심판의 방랑이 부르심의 순례로 바뀌는 것 — 이것이 창세기가 보여주는 구속사의 첫 번째 반전이다.
우리의 삶도 끊임없이 이 선택 앞에 놓인다. 안정된 직장, 익숙한 관계, 편안한 신앙 — 이 모든 '성' 안에 머물고 싶은 유혹은 매일 찾아온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한다. 믿음의 조상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히 11:13)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성주(城主)가 아니라 본향을 향해 걷는 나그네이다. 안주하는 순간 성장은 멈추고, 떠나는 순간 은혜의 새 지평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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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다와 씰라 — 인간 문명의 두 얼굴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4:19)
가인의 6대손 라멕. 그의 이름은 '힘센 자'라는 뜻이다. 성경이 기록하는 최초의 일부다처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족보가 단순히 한 남자의 가족사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라멕의 두 아내는 인간 문명의 두 얼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3].
첫 번째 아내 '아다' — 그 이름의 뜻은 '새벽의 여명'이다. 아다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은 야발과 유발이다. 야발은 “장막에 살며 가축 치는 자의 조상”(4:20)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4:21)이 되었다. 목가적이고 전원적이며 평화로운 세계. 음악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세계. 이것이 아다가 대표하는 인간 문명의 한 축이다.
두 번째 아내 '씰라' — 그 이름의 뜻은 '어둠의 그늘'이다. 씰라에게서 태어난 아들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4:22) — 곧 금속 연장과 무기를 제조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고 족보에 이례적으로 여성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씰라의 딸 '나아마'다. 그 뜻은 '사랑스러움' — 그것도 육체적 매혹과 연결되는 이름이다. 전투적이고 경쟁적이며 관능적인 세계. 이것이 씰라가 대표하는 인간 문명의 또 다른 축이다.
라멕의 두 아내는 인간 안에 있는 두 품성을 가리킨다. 우리는 아다처럼 전원적이고 낭만적인 평화의 삶을 꿈꾸면서도, 동시에 씰라처럼 전투적이고 경쟁적인 삶을 살아간다. 수금을 연주하는 유발과 무기를 제조하는 두발가인이 한 집안의 이복형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예술과 폭력이 같은 아버지의 이름 아래 자라고 있다. 인류의 문명은 바로 이 두 얼굴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의 마음은 악마와 신이 싸우는 전장이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 전장의 양쪽 진영을 상징한다. 우리 안에는 유발과 두발가인이 동시에 살고 있다. 이 모순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이해의 출발점이고, 이 모순 앞에서 무릎 꿇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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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라멕의 노래 — 무기를 등에 업은 폭력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4:24)
라멕의 범죄는 가인보다 한 차원 더 깊고 교활하다. 그는 아내들 앞에서 한 편의 노래를 부른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4:23). 히브리어 원문의 이 동사 '하라그티'는 과거형과 미래형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4]. “이미 죽였다”는 자랑일 수도 있고, “죽여버릴 것이다”는 예고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것은 폭력의 자기 정당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노래의 자리다. 바로 앞 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씰라도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4:22). 금속 무기 제작의 탄생과 라멕의 보복 선언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이 배치는 우연이 아니다. 문명의 진보(금속 연장)가 곧바로 폭력의 증폭(칠십칠 배의 복수)으로 이어지는 것 — 이것이 창세기가 그리는 인류 문명의 어두운 그림자다. 기술은 중립이지만, 그 기술을 쥔 손은 중립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 — 과학과 기술이 평화의 도구이기도 하고 전쟁의 증폭기이기도 한 이 시대 — 에 대한 고대의 거울이 여기에 있다.
더 깊은 것은 이것이다. 가인은 적어도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라멕은 하나님의 법을 자기 편의대로 왜곡하여,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주시며 보복 살인을 금지하신 것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라멕은 이 보호의 법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가인을 해치면 칠 배의 보복이 있는데, 나를 해치면 칠십칠 배의 보복이 있을 것이다.' 은혜의 법이 복수의 도구로 변질된 순간이다.
이 장면은 오늘도 반복된다. 우리는 남에 대해서는 정의를 말하며, 자신에 대해서는 사랑을 말한다. 타인의 잘못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나 자신의 잘못에는 한없이 관대한 이중 잣대 — 이것이야말로 라멕의 유산이다.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주어졌지만, 힘 있는 자는 늘 그 법을 자기 방패로 삼는 법을 익혀 왔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충격적이다.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고 답하셨다[5]. 라멕의 '칠십칠 배'에 대한 의도적 전복이다. 라멕이 '칠십칠 배'의 복수를 노래했다면, 예수께서는 같은 숫자의 질감 안에서 '칠십 번씩 일곱 번'의 용서를 명하신다. 복수의 수학이 용서의 수학으로 뒤집힌 것이다. 라멕의 노래는 인간의 폭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용서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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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두 족보 — 흐려지는 이름과 깊어지는 이름
창세기 4장은 기묘한 대칭을 보여준다. 17-24절은 가인의 족보다.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 —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고 복수를 노래하는 자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25-26절은 갑자기 장면을 전환하여 셋의 족보를 시작한다. 셋, 에노스. 이 두 족보가 나란히 배치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인의 족보에서 이름들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강해지고 화려해진다. 에녹은 성이 되고, 두발가인은 무기를 만들고, 라멕은 칠십칠 배의 복수를 노래한다. 힘이 쌓이고, 기술이 발전하고, 목소리가 커진다. 그러나 그 힘은 결국 라멕 한 사람의 자기 과시에서 정점에 도달한 뒤, 6장의 홍수와 함께 흔적 없이 사라진다. 가인의 이름은 크게 울렸지만, 그 울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셋의 족보는 정반대의 리듬을 가진다. 요란하지 않다. 정복도 없고, 건설도 없고, 무기도 없다. 다만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4:25) — 이 한 줄의 조용한 탄생 선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조용한 계보가, 결국 노아로, 아브라함으로, 다윗으로,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어지는 구원의 대로(大路)가 된다.
세상의 눈에는 가인의 족보가 '성공한 이름들'이고 셋의 족보가 '잊혀진 이름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정반대다. 힘센 이름은 6대 만에 사라지고, 연약한 이름은 수천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계보가 된다. 당신은 지금 어느 족보에 이름을 올리고 싶은가. 소리 높여 외치는 라멕의 후손이 될 것인가, 조용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셋의 후손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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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셋과 에노스 — 연약함에서 시작되는 예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26)
아벨을 잃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새 아들을 주신다. 그 이름은 '셋' — '기초, 터전, 심어진 씨'라는 뜻이다[6]. 아벨의 죽음을 허무로 돌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한 가인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에 다시 새 기초를 놓으시는 분이다. 하와는 셋을 낳으며 고백한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4:25). 여기서 '씨'는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씨)' —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그분 — 과 같은 단어다. 셋의 탄생과 함께, 구속의 약속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셋의 아들 이름은 '에노스'다. 그 뜻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이름에는 중요한 뉘앙스가 숨어 있다. 에노스는 '연약하다'는 어근에서 파생된 말이다[7]. 아담이 '흙에서 온 사람' 일반을 가리킨다면, 에노스는 '연약한 사람'을 가리킨다. 자신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 — 그것이 에노스가 드러내는 인간의 참된 초상이다. 훗날 시편 기자가 “사람(에노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시 8:4)라 노래했을 때의 그 '사람'이 바로 이 단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작게 아는 자의 이름이다.
그래서 바로 이어 기록된 한 줄이 의미심장하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26)[8].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공동체적 예배가 에노스 시대에 처음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다. 하와가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른 적이 있었지만(4:1), 공동체가 함께 모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는 이제 비로소 시작된다. 그리고 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은 훗날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이르러 반복하는 바로 그 예배의 원형이 된다(창 12:8; 13:4; 21:33).
여기에 창세기 4장의 결정적 대조가 있다.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며 복수의 노래를 부르는 라멕의 세계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에노스의 세계. 이 두 세계가 한 장(章) 안에 나란히 놓여 있다. 힘센 자 라멕은 “내 목소리를 들으라” 외쳤고, 연약한 자 에노스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의 목소리가 역사에 남았는가. 누구의 이름이 오늘까지 불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재창조는 멈추지 않는다. 가인의 죄에도, 라멕의 폭력에도, 인류의 타락이 깊어져만 갈 때에도, 하나님은 새로운 '셋'을 세우시고 새로운 '에노스'를 불러일으키신다. 역사의 밤이 가장 깊어지는 순간, 하나님은 이미 다음 새벽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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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문 — 아다와 씰라 사이에 선 우리에게
우리는 모두 아다와 씰라 사이에 서 있다. 평화를 꿈꾸면서도 경쟁에 몰두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면서도 폭력에 끌리는 존재. 이 모순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완전히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4장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가인의 후손들이 문명을 건설하며 동시에 타락해 갈 때, 하나님은 조용히 셋이라는 새로운 계보를 여셨다. 라멕이 복수의 칠십칠 배를 외칠 때, 하나님은 이미 용서의 칠십 번씩 일곱 번을 준비하고 계셨다. 화려한 족보가 6대 만에 홍수로 사라질 때, 조용한 족보는 그리스도께로 이어지는 씨앗이 되어 있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성' 안에 안주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떠나라'고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 안에서 라멕의 목소리 — 남에게는 정의를, 자신에게는 관용을 요구하는 그 목소리 — 가 들리지는 않는가. 그리고 그 소음 너머로, 조용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에노스의 작은 기도 소리가 들리는가.
에노스의 이름이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예배의 시작이다. 자신의 이중성을 솔직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새벽과 그림자 사이,
그 어슴푸레한 경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당신의 목소리가
새 역사의 시작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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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 나는 지금 어떤 '성' 안에 안주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떠나라'고 부르시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둘. 내 안의 '아다'와 '씰라'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공존하고 있는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나와 경쟁에 몰두하는 나 사이에서, 나는 어느 쪽에 더 많은 시간을 내어주고 있는가?
셋. 남에게는 '정의'를, 나 자신에게는 '사랑'을 요구하는 라멕적 이중 잣대가 내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넷. '에노스'처럼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시간을 오늘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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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히브리어 נָע וָנָד(나 바-나드, '피하며 유리하는 자'). 어근 נוּד(누드, '떠돌다')에서 왔다. 가인이 훗날 정착한 '놋'(נוֹד) 땅의 이름도 같은 어근이다.
[2]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히브리어 'לֶךְ־לְךָ'(레크-레카, '너를 위해 가라')는 성경에서 단 두 번 — 아브라함의 부르심(창 12:1)과 이삭의 번제(창 22:2) — 에만 사용된 특별한 명령 어법이다.
[3]아다(עָדָה)는 '장식하다, 꾸미다'는 어근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아침 여명'과 연결되는 의미를 가진다. 씰라(צִלָּה)는 '그늘, 그림자'(צֵל, 첼)에서 온 이름이다.
[4]히브리어 הָרַגְתִּי(하라그티, '내가 죽였다')의 시제는 과거형과 미래형 모두 가능하다. 과거형이면 “이미 죽였다”는 자랑이고, 미래형이면 “죽여버릴 것이다”는 예고이다. 두 경우 모두 폭력의 자기 정당화이며, 아들 두발가인이 금속 무기를 만든 맥락(4:22)과 결합되어 “무기의 힘을 등에 업은 보복 선언”의 성격을 띤다.
[5]마태복음 18:22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물었을 때 예수께서 주신 답이다. '칠십 번씩 일곱'이라는 숫자가 라멕의 '칠십칠 배'(창 4:24)와 의도적으로 공명한다는 것은 다수 주석가들의 견해이다.
[6]히브리어 שֵׁת(셋). 어근 שִׁית(시트, '두다, 세우다')에서 왔다. '터를 세움', '기초'의 의미. 하와가 “하나님이 내게 아벨 대신에 다른 씨(זֶרַע, 제라)를 주셨다”(4:25) 고백한 것은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씨)' 약속과 직접 연결된다.
[7]히브리어 אֱנוֹשׁ(에노스). 어근 אָנַשׁ(아나쉬, '연약하다, 병들다')에서 왔다. 아담(אָדָם)이 '흙에서 온 사람'이라면, 에노스는 '연약한 사람'이다. 시편 기자가 “사람(에노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시 8:4)라 노래할 때 쓰인 바로 그 단어이다.
[8]히브리어 הוּחַל לִקְרֹא בְּשֵׁם יְהוָה(후칼 리크로 베쉠 아도나이, '그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 동사 קָרָא(카라, '부르다')는 이후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12:8; 13:4; 21:33)는 표현으로 반복된다. 공동체적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전문 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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