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1 15:42
거울 앞에 서다
—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는다 —
창세기 강해를 시작하며
서론 | 당신은 지금, 무엇을 읽고 있습니까
새벽 다섯 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머리맡에 놓인 성경책의 모서리가 희미한 불빛 아래 빛나고 있었다. 그 책을 펼치려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이 책을 읽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 책이 나를 읽고 있는 걸까?'
우리 대부분은 성경을 '읽어야 할 책'으로 여긴다.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고, 신앙생활의 기본이라고 들었다. 일 년에 한 번 성경 통독을 결심하고, 몇 주 만에 레위기 어딘가에서 멈추는 경험을 반복한다. 혹은 유명한 구절 몇 개를 암송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위안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우리는 성경이라는 거울 앞에 제대로 서 본 적이 있는가?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 성경을, 다른 손에 신문을 들고 세상을 읽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충고 이전에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 성경이라는 책이 대체 어떤 책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 책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말이다.
본론 | 한 권의 책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온 이야기들
1. '거룩한 책'이 아니라, '그 책들'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가 'BIBLE'이라고 부르는 이 책의 원래 이름은 '성스러운'이라는 수식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히브리어로 '하 세파림(Ha Sefarim)', 희랍어로 '비블리아(τά βιβλία)' — 그 뜻은 단순히 '그 책들'이었다. '거룩하다(HOLY)'는 수식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결정적인 통찰을 준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신비로운 문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추악한 민낯과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뒤엉킨 현장에서 태어난 기록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불렸지만, 그의 간음과 살인은 성경이 가감 없이 드러낸다. 교회의 반석이라 불린 베드로조차 어느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질책을 듣는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힘이다.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으나, 추한 것까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마치 화장을 지우고 거울 앞에 설 때 비로소 자신의 본래 얼굴을 볼 수 있듯이, 성서는 우리의 화장을 지우는 거울이다.
2. 쪼개진 동물 사이를 지나며 — 약속이란 무엇인가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에서 '약(約)'은 계약, 곧 코브넌트(covenant)를 뜻한다. 히브리어 '브리트(berith)'의 원래 의미는 놀랍게도 '자르다', '베다'이다. 창세기 15장에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장면이 등장하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질 짐승을 쪼개라고 명하신다.
고대 근동의 종주권 계약에서는 쪼개진 동물 사이를 지나면서 서약을 맺었다. 그 의미는 준엄했다.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찢기리라.' 약속이란 그저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목숨을 담보로 한 맹세였고, 존재 전체를 걸어놓은 행위였다.
현대인에게 약속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카카오톡 메시지로 '곧 갈게'라고 보내놓고 한 시간을 늦는 일이 다반사이고, 새해 결심은 1월이 지나기도 전에 증발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약속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약속이며, 생명을 내어놓는 언약이다. 그리고 성경은 묻는다 — 당신은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는가?
"약속은 믿음을 전제한다. 믿을 수 없는 약속이라면 무의미하다. 이 믿음에서야만이 약속은 은혜이다."
3. 곧은 갈대 한 줄기 — 정경, 믿음의 기준이 세워지기까지
정경(正經)이라는 말의 뿌리는 히브리어 '카네(qaneh)'이다. 이 단어의 뜻은 '곧은 막대기', '곧은 갈대'이다. 단순히 물리적 막대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바른지 가늠하는 기준과 척도를 가리킨다. 이것이 희랍어 '카논(Κανών)'을 거쳐 영어의 'Canon'이 되었고, 4세기경 기독교 교회에서 정경이라는 의미로 자리잡게 되었다.
구약의 정경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세 오경이 기원전 450년경 가장 먼저 정경으로 인정받았고, 예언서는 기원전 2세기, 성문서는 기원후 90년경 얌니아 종교회의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수백 년에 걸쳐 믿음의 공동체는 물었다 — '이 글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담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곧게 세우는 갈대가 될 수 있는가?'
신약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다. 역설적이게도, 신약의 정경을 처음 제정한 인물은 이단자 마르시온이었다. 그는 구약을 전적으로 배격하고 누가복음과 일부 바울서신만을 자기 경전으로 삼았다. 이 사건은 교회에 경종을 울렸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어떤 글이 사도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 가려내는 작업이 시급해진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질문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시대, 무수한 정보와 해석이 범람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 나의 신앙을 곧게 세우는 기준은 무엇인가? 내 삶의 '카논'은 어디에 있는가?
4. 안경을 바꾸다 — 선입견이라는 색안경 너머로
창세기를 읽으면 우리가 받아야 할 도전적인 메시지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읽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전이 일어나려면, 먼저 우리가 쓰고 있는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첫 번째 안경은 교리에 대한 선입견이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교리를 떠올려보라. 우리는 이것을 마치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마술처럼 세상을 만들어낸 것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창세기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무(無)'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를 가리킨다. '땅이 혼돈하고'(창 1:2),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 빛이 있기 전에 이미 땅과 물이 있었다는 것을 본문 스스로가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의 의미를 더 깊이 드러낸다. 하나님의 창조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이며, 어둠 속에 빛을 선언하는 사건이다. 마치 화가가 빈 캔버스가 아니라 얼룩진 캔버스 위에 작품을 그려내듯, 하나님은 혼돈 그 자체를 재료 삼아 아름다움을 직조해내시는 분이다.
두 번째 안경은 이념에 대한 선입견이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자본주의의 정당화로 읽는 이들이 있고,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를 공산주의의 근거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는 경제 이론의 교과서가 아니다. 비유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말하며, 그 논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이념의 틀에도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세 번째 안경은 제한된 신앙 체험의 절대화이다. '기도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많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이다. 그러나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기도가 부족했다'며 자신을 탓하고, '정성이 없었다'며 죄책감에 빠진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자칫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적 반응과 다를 바 없다.
중요한 것은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이다. 내용 없는 맹목적 믿음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에 가깝다. 진정한 믿음은 거울 앞에 서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 내가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성서가 가르치는 믿음인지, 정직하게 묻는 용기 말이다.
네 번째, 그리고 가장 위험한 안경은 거두절미(去頭截尾)의 습관이다. 요한복음 15장 7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많은 이들에게 기도의 절대적 효능에 대한 보증수표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구절의 바로 앞에는 결정적인 전제가 붙어 있다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앞뒤를 잘라낸 성경 읽기는 원석에서 보석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보석의 가장 중요한 면을 깎아버리는 것과 같다.
5. 사실 너머의 진실 — 성경이 정말 말하고 싶은 것
세익스피어의 햄릿에는 유령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무도 유령이 나온다는 이유로 이 작품이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작품의 사실성이 아니라 진실성이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으로 읽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바로가 그들을 '쫓아낸' 것으로 묘사된다(출 6:1, 11:1). 각 복음서마다 같은 사건에 대한 서술이 조금씩 다르고, 예수의 족보조차 마태와 누가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불일치 앞에서 어떤 이들은 당황하고, 어떤 이들은 신앙의 위기를 느낀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생각해 봐야 한다. 성경의 관심은 사실(fact)이 아니라 진실(truth)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난 방식이 어떠했든, 그 사건을 해방의 경험으로 고백한 신앙이 중요하다. 요한복음이 예수의 기적을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σημεῖον)'이라 부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표적이란 사건 너머에 있는 의미를 가리킨다. 단순한 초자연적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긴 사건인 것이다.
2010년, 칠레의 산호세 광산에서 33명의 광부가 69일간 지하 700미터에 갇혀 있었다. 그들이 마침내 구조되었을 때, 전 세계가 함께 울고 환호했다.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구조의 기술적 사실만이 아니었다. 절망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한정된 식량을 나누며,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인간 정신의 진실이 감동을 주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같다. 역사적 사실의 정확한 보고서가 아니라, 그 사실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진실 — 구원과 해방과 새 생명의 이야기이다.
6. 성경의 손가락은 언제나 나를 가리킨다
성경에 등장하는 문둥병자는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어느 특정한 환자가 아니다. 죄에 무뎌진 나 자신을 가리키는 거울이다. 예수 앞에 나아간 세리는 역사 속 인물이기 이전에, 탐욕에 얼룩진 오늘의 우리를 비추는 초상화이다. "바로 병든 그 사람의 자리에 내가 서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을 때, 성경의 메시지는 언제나 남의 이야기에 머문다. 설교를 들으며 옆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성경을 읽으며 다른 누군가를 심판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직 거울 앞에 서지 못한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치하에서 신앙의 자리를 물었다. 그가 추구한 것은 교리의 정확성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 앞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 라는 실존적 질문이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의 다양성에 주목해야 한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의 시작을 육적인 탄생에서 출발시키지만, 마가는 탄생 이야기를 생략하고, 요한은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예수님을 증언하면서도 네 복음서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진실이 하나의 언어로는 다 담기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다이아몬드가 여러 면을 통해 빛을 발하듯, 복음의 진실은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더 풍성해진다.
결론 | 거울 앞에 서는 용기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새벽 어둠 속에서 성경을 펼치려던 그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다. 더 정교한 해석 기술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거울 앞에 서는 용기이다.
성경은 '하 세파림', 그냥 '그 책들'에서 시작했다. 거룩하다는 이름은 나중에 붙여졌다. 그러나 어쩌면 그 이름이 늦게 붙여진 데에는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진정 거룩해지는 순간은 인쇄된 활자 속에 있지 않다. 그 글자들이 한 사람의 삶을 뚫고 들어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어둠에 빛을 선언하는 그 순간 — 바로 그때 이 책은 비로소 '거룩한 책'이 된다.
창세기 강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지금 첫 발을 내딛고 있다. 이 여정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선입견이라는 색안경을 벗으라. 교리가 성경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리를 세우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한 번 괄호 안에 넣고, 본문 자체가 말하는 바에 귀 기울이라.
둘째, 사실에 집착하지 말고 진실을 찾으라. 성경의 어떤 구절이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하느냐는 질문보다, 그 구절이 나의 삶에 어떤 진실을 던져주느냐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 성경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나를 놓으라. 문둥병자의 자리에, 세리의 자리에, 빈 손으로 예수 앞에 선 사람의 자리에 내가 서야 한다. 그때 비로소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기 시작한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는다. 성경이라는 거울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민낯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민낯 위에 은혜의 빛이 비추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성경을 읽는 일의 시작이며, 창세기를 펼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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