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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⑦헤롯과 예루살렘 1

입력 2014-02-28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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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⑦헤롯과 예루살렘 1 기사의 사진

비극 부른 헤롯의 폭력… ‘비밀경찰’ 만들어 소문 수집까지

하스모니아 왕조의 몰락

주전 167년 마카비 혁명에 동참했던 모디인의 제사장과 유대인들은 셀루시드 왕조에 의해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았다. 마카비 형제들 중 막내인 시몬은 주전 142년 대제사장과 군사들의 최고 지휘관 자격으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추대되었다. 이것이 하스모니아 왕조의 시작이다. 셀루시드의 신식민지였다는 논란이 있지만, 유다인의 독립왕조로서 무려 10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로마는 그들이 원하는 자를 유다의 통치자로 앉혔다. 통치자로 선택받은 자는 안티파테르였다. 안티파테르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구약시대 에돔과 관련이 있는 이두메아인이었다. 에돔은 주전 553년 바빌론의 나보니두스(주전 553∼543년)에 멸망당했다가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이 다시 점령했었다. 나바테아를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네게브 북쪽 지역(신광야·현재 이스라엘 브엘세바 남쪽지역)으로 이주했다.

에돔 사람들이 머물게 된 이 지역을 헬라어로 이두메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이두메아 지역은 유다와 함께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아래 있다가 셀루시드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마카비와 유다 독립군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영토를 되찾으면서 이두메아 역시 유대 국가에 종속되었다. 이 땅의 남자들은 할례를 받고 모두 유대교로 개종해야만 했다. 로마 역시 이두메아를 유대의 통치 지역으로 간주했다. 이두메아 사람들은 서서히 유대화되어 갔다.

하스모니아 왕조의 장관 중 한 사람이었던 안티파테르는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로마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로마의 새로운 통치자로 부상한 율리우스 시저와 쟁투를 벌이는 동안 안티파테르는 오히려 시저를 도왔다. 시저가 승리하자 그는 잽싸게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권리를 얻어 유다의 통치자로 변신했다.

안티파테르는 그의 통치영역을 나누어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예루살렘은 큰 아들 파사엘에게 맡겼고 갈릴리 지역은 둘째 아들 헤롯에게 맡겼다. 이두메아 사람들이 유대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은 이두메아를 경멸하고 천하게 여겼다. 더구나 로마의 세력을 업은 안티파테르를 곱게 볼 리는 없었다. 결국 안티파테르는 독살당하고 말았다.

분봉왕 헤롯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이 바로 안티파테르의 뒤를 이어 유대 땅을 통치한 이 인물이다. 주전 74년 안티파테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헤롯은 유대화된 이두메아인으로 성장하였다. 유대의 전통과 관습을 몸에 익혔고 스스로 유대교인임을 주장했지만, 유대인들은 한 번도 헤롯을 같은 민족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25세에 유대를 통치하게 된 헤롯은 아버지에게서 갈릴리 지역의 통치권을 받았지만, 안티파테르가 독살당하고 하스모니아 왕조가 다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게 되자 로마로 도망을 갔다.

주전 40년 헤롯은 로마의 도움으로 다시 유대의 분봉 왕으로 책봉되었다. 그는 로마의 군사와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헤롯은 자신의 왕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유대인들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그는 세 살이 된 아들과 도리스라 불리는 아내를 버리고 마지막 남은 하스모니아 왕조의 공주 미리암과 혼인했다. 헤롯은 이제 유다 땅의 통치자로서 스스로 ‘바실레우스’ 즉 왕이라 부르며 헤롯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주전 37년).

이 당시 주조된 동전에는 받침대 위에 놓여진 헬멧과 함께 헬라어로 ‘바실레우스 헤롯’이라고 새겨져 있다. 헬멧 꼭대기에는 별이 달려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황제의 얼굴로 장식한 로마 동전과 달리 헤롯의 얼굴이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형상을 새기지 않는 유대교적 관습을 따르고자 했던 것 같다.

로마의 인정도 받고, 왕이라 자칭했고, 유대 공주를 아내로 삼아 정통성을 주장했지만 헤롯의 불안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비밀경찰을 만들어 소문을 수집했다. 그에게 반감을 드러낸 백성에게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약성서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그의 궁전으로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경배하고자 했을 때, 그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물어 베들레헴에 왕이 태어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부탁했다.

박사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헤롯은 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고 말았다(마 2:1∼18). 그에게 소문은 미리 싹을 잘라 내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의 폭력과 의심은 비극을 불렀다. 그는 아내 미리암에 대한 집착으로 의심을 버리지 못해 그녀를 죽였고 그의 아들마저 살해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헤롯의 궁전

요세푸스는 건축 마니아였던 헤롯이 헤로디온 마사다 가이사랴 사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도 얼마나 아름다운 성전과 궁전을 건설했는지 기록하였다. 건축에는 로마와 유대 사이에 갈등했던 헤롯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로마와 그 문화를 사랑하였던 헤롯은 로마식 기둥과 건축 양식을 도입했다. 도시의 이름은 로마의 황제에게 바치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러면서도 헤롯은 여전히 유대인들에 대한 견제를 잊지 않았다. 로마는 신의 형상이나 동물을 그려 넣었지만, 유대교의 율법에는 어긋난 것이었다. 대신 꽃이나 기하학적인 무늬들로 건물을 장식했다. 로마의 예술 사조를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다. 세푸스에 의하면 헤롯은 성전 입구에 금으로 만든 독수리를 장식했다. 예루살렘에는 로마의 극장과 그의 화려한 궁전이 건설되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안타깝게도 예루살렘에서 헤롯의 건축물들을 찾아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2000년이라는 세월동안 사람들이 거주했던 예루살렘 도심을 파헤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요세푸스의 기록과 일부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 주전 1세기 헤롯의 화려한 궁전과 로마화되어 가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예루살렘의 북서쪽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헤롯의 궁전은 하스모니아 왕조의 궁전을 더 확장한 재건축물이었다. 현재 ‘다윗 탑(Tower of David)’이라 불리는 곳에서 궁전의 일부분을 볼 수 있다. 터키가 이스라엘을 통치했을 때(1517∼1917) 이곳을 감옥으로도 사용하면서 상당히 파손되었다. 헤롯의 궁전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탑들 중 히피쿠스라 불리는 탑의 기초부분은 볼 수 있다. 궁전에는 그의 큰 형 파사엘과 아내 미리암의 이름으로 불리는 탑이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파사엘 탑의 경우 그 높이가 44m에 이르렀다고 한다. 궁전은 4∼5m 정도 높게 쌓은 남북으로 304m, 동서로 54m의 넓은 기반 위에 세워졌다. 궁전의 중앙은 기둥들로 둘러싸여져 있는 정원으로 연못과 나무들이 있었다. 정원을 중심으로 아그립바와 시저라 불리는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각 구역에는 연회장과 목욕탕, 수백 개의 방들이 있었다.

헤롯의 궁전은 그의 형제들이 유대 땅을 통치할 때도 여전히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가이사랴와 헤로디온, 여리고에도 아름다운 궁전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이 항상 이 궁전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궁전은 로마 총독이나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올 때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을 항상 견제하고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던 헤롯 왕가 역시 절기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궁전에 머물렀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유월절에 이루어졌다. 당시 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 역시 마침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이 궁전에서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조롱하는 행위를 하였을 것이다(눅 23:7∼12).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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