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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자료 악고(Acco)

2014.05.22 09:54

운영자 조회 수:1394

악고(Acco)

악고평원(平原) or 평야(平野)

팔레스틴은 많은 자연 지역들로 나뉘어 있으며 우리는 이 땅을 경도상으로 해안평야 지대, 중앙 산맥지대, 요단계곡, 그리고 트랜스요르단 고지대로 나눈다. 성서에 등장한느 악고는 해안 평야지대--풍유한 충적토, 풍부한 샘들, 높은 지하수면을 가짐으로 팔레스틴의 지역들중 가장 풍요한 지역, 인구 조밀--중 최북단에 위치한 해안 평원에 있는 성읍이었다. 이 성읍의 이름을 따서 그 평원의 이름을 '악고평원'이라고 부르는데 이 해안 평원은 지중해로부터 갑자기 우뚝 솟아오르고 있는 두 개의 가파른 산맥에 의해 분계(分界)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두로의 사다리'(the Ladder of Tyre)라고 하는 북쪽의 라스 엔-나쿠라(Ras en-Naqurah)벼랑이다. 이 벼랑은 하얀색의 해식애(海蝕崖, Wave-beaten Cliff, 파도에 의해 깎여진 생긴 해안의 급한 낭떠러지)이다. 다른 하나는 남쪽의 갈멜 산(Mt. Carmel)이다. 이 산은 울창한 산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악고 평원의 동-남쪽은 갈멜산과 하부 갈릴리 사이에 있는 좁은 분곡을 따라가면 이스르엘 골짜기와 연결되는데 이 분곡을 따라 기손(Kison)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악고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며 넓은 악고-하이파(Haifa)만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악고는 북-서풍의 피해를 다소 덜 입는 곳이다. 악고시(市)는 넓이가 거의 비슷한 두 지역으로 나뉘고 있다. 두 지역은 모두 고대에는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었다. 악고 평원의 북부 해안 지대는 모래 언덕이 없는 바위로 이루어져있다. 이렇게 두 지역의 경작지와 길은 해변으로 통하고 있다.
『구약성서지리학』, Y. 하라로니 저, 이희철 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76.

I. 명칭과 의미
명칭과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면 악고 Acco(地) 라는 명칭은 '슬퍼하게 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아카르)에서 유래했는데 히브리어로는(악코), 초기 헬라어로는(아케), 후기 헬라어로는(프톨레마이스), 이집트어(아카), 아카드어  (아쿠), 아마르나어(아카) [AV], [KJV]에는 'Accho'로 되어 있으며, 그 의미는 '무더운', '무덥다' 또는 '열사(熱沙)'라는 뜻이고 '악고'의 현재 명칭은 팔레스타인의 북부 갈멜산 북쪽에 있는 아크레(Acre)이다.

II. 위치, 지리적 배경
'악고'(성읍)는 맨 처음에 설명했듯이 갈멜산(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산, 해발고도 546m. 지중해 연안의 도시 하이파 남동쪽 8km되는 지점에 있다.) 북쪽에 있는 작은 해안평야(악고평야)에 세워졌는데 고대의 이 마을은 본래 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으며, 평야는 이 마을의 명칭을 따라 불리어졌다. 그 평야는 북쪽으로 북 갈릴리 산지의 가장 서쪽 지역인 예벨 엘 무샤카(Jebel el-Mushaqqah)까지 뻗어있는데(예벨 엘-무사카로 막혀 있음), 산은 바다 쪽으로 가파르게 경사져 있으며 팔레스타인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해안평야는 악고를 중심으로 --악고가 위치해 있는 곳에서-- 그 폭이 약 6.4-6.5km 정도이다. 천연의 만(灣)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악고는 팔레스타인 해안에 있는 몇 안되는 좋은 항구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오늘날의 악고는 단지 조그만 소읍(작은부락)일 따름이며 현재의 중요한 항구는 같은 평야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현재의 하이파(Haifa-팔레스타인 북부의 항만도시. 인구 25만 1000(1992). 지중해로 튀어나온 갈멜산지 북단에 있다. 이스라엘 지배지역에서는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다음가는 도시이다.) 에 위치해 있다(현대의 하이파 항(港)). 1929년에 사아리살로(Saarisalo)가 아크레의 동쪽에서 1.6km가량 떨어진 아인 에스 싯트(Ain es-Sitt)근처의 텔 엘 푸크하르(Tell 디-Fukhkhar)에서 발굴작업을 행했는데, 어떤 학자들은 이곳을 고대의 악고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텔 엘 푸크하르는 한 때 그곳에 위치했던 프톨레마이스 성채(城砦)였다는 것이 더 그럴 듯하다.
현재는 하이파 항의 북쪽 16km, 갈멜산 북쪽 13km, 두로 남쪽 48km의 '악카(Akka)' 또는 '아크레(Acre)'와 같은 곳으로보며 하이파와의 사이에 기손강이 흐른다. 이곳은 팔레스틴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항구이나 현재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이파 항(港)이 더 번성해 있고 이 곳은 차츰 쇠잔(衰殘)해졌다.

III. 성서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
악고 성읍은 구약성서에서 한 번 --'악고'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고(삿1:31) 신약에서도 '돌레마이'라는 이름으로(행21:7) 한 번 기록되어 있다. 구약에 등장하는 악고는 가나안 정복전쟁 때 아셀 지파에게 할당된 구역이었지만, 그들은 여호수아의 사후(死後) 다른 지파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삿 1:19-33) 이곳 주민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다. (아셀 지파가 해안 쪽으로 공격해 갔지만, 삿1:31-32에는 '아셀이 악고 거민을... 쫓아 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불완전한 가나안 정복을 의미 하는데 이렇게 되자 가나안 거민들은 '결심'을 하고 그 땅에 거하게 되었고, 이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진멸하라(신7:2)고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으며, 후에 우상숭배에 빠지는 원인이 됨과 동시에 사사시대의 혼돈과 암흑의 역사를 가져오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악고는 신약에서 '돌레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 하는데 바울은 그의 로마 감옥에의 투옥과 죽음이전 최후 예루살렘 여행(제3차 전도 여행)때 두로에서 배를 타고 이 곳에 상륙하여 이곳의 신도들과 하루를 함께 지내고(행21:7) 육로로 예루살렘으로 갔다. 바울은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만류에도 예루살렘 여행을 결행하였고 그는 여기서 이미 예수의 이름을 위한 죽음을 각오하였다.(행21:13).
악고는 BC 19세기의 작은 입상(立像)위에 기록된 이집트의 저주문서에 언급되어 있으며, BC 14세기의 아마르나 문서(Amarna Letters)에서도 여러번 나온다. 서로 적대적으로 경쟁하던 가나안의 군주들이 각각 상대국의 배반을 바로에게 서신으로 고소했던 것으로 보아, 악고에 대한 이집트의 통치가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C 15세기 초에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가 악고를 점령했으며, 14세기 말에는 세티 1세(Seti I)가 점령했다. 또한 13세기에 람세스 2세(Ramses II)도 악고를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후에는 새로운 적들 --구약성서 이스라엘의 아셀지파; 아셀 족속이 이 해안으로 밀어 닥친 것은 이 시대(람세스 2세 시대) 이후이다. 그러나 삿1:31-32에 기록되었듯이 '아셀이 악고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다.'-- 이 출현했다.
BC 733년에 악고는 디글랏 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에 의해 앗시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약 100년후에,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이 많은 백성을 추방하고 나머지는 죽여 버렸다. 헬레니즘 시대에 악고는 프톨레 마이스로 개명(改名) --BC 3세기경에 돌레미 2세의 이름을 따라서 돌레마이라 하였다-- 했으며, 프톨레 마이스 왕조와 셀류커스 왕조 때에 중요한 항구 구실을 했다. 마카베오 상 저자에 의하면, 프톨레 마이스는 마카베오의 적대자들이 세력을 떨치던 곳 --마카베오의 적대자들의 중심지-- 이었다. (마카베오상 5:15) BC 150년 직후에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는 마카베오 요나단에게 프톨레마이스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후 요나단은 데메드리오 2세로부터도 같은 명을 받았다. (마카베오상10:51-66, 11:21-74) 세 번째는 트리폰(Tryphon)으로부터 같은 전갈을 받았으며, 그후 체포되어 죄수로 프톨레마이스에 감금되었다.(마카베오상 12:39-48)
BC 65년에 프톨레마이스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바울의 3차 여행때 상륙하였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중세에는 십자군들이 이 성읍을 거의 200년 동안 점령했는데, 그때는 '성(聖) 쟌 다르크(St. Jean d'Acre)'라고 불리었으며 그래서 현재는 아크레(Acre)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이렇듯 악고는 역사속에서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았으면서도 아라비아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써, 성지로 들어가는 주요 항구로써의 중요성을 늘 인정받아 왔다.

IV. 고고학적 발굴
1950년 이후 이스라엘 고적관리국에서 발굴에 착수했으며, 1973년부터는 도탄(Dotan)과 린드너(Lindner)의 지휘아래 하이파 대학(고대 문화부)과 고적관리국에 의해서 계속 발굴 작업이 실시되었다. 고고학적인 유적이 입증한 바와 같이, 악고(텔 엘 푸크하르 [Tell 디-Fukhkhar], 현재는 텔 악코[Tel Acco]라고 부름)는 중기 청동기시대 제2기 (MB II), 즉 아마도 일찍이 BC 19세기에 창건된 듯하다. 악고는 182,000㎡ (약 45에이커)에 걸쳐 펼쳐지는 동부 지중해 연안(Levant)의 큰 도시국가들 중 하나가 되었다. 악고는 거대한 토벽(土壁)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벨루스(Belus)강 어귀에 위치해 있어서 안팎으로 커다란 정박소(碇泊所)를 제공하고 있다. 악고가 후기 청동기시대 동안에 광범위한 해상 무역과 상업상의 거래처였다는 것이 성문의 북쪽에 있는 무덤의 부장품, 즉 갑충석과 아멘오피스 3세(Amen-Ophis III, BC 1412-1375년)의 인장 및 미탄니(Mitanni) 원통인장 등으로 알 수 있다. 다른 발굴품들로는 미케네 문명의 영향을 받은 황금 왕관과 미케네 도자기, 그리고 고고학자들이 가장 놀랄만한 약간의 후기 미노스(혹은 크레타) 문명 제3기(Late Minoan III B)의 사금파리들이 있다. BC 12-11세기의 도자기들은 해양민족(블레셋, 블레셋 사람[Philistia, Philistines])들에 의해 약탈을 당한 후에도 악고는 여전히 중요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또한 당시에 악고가 중요한 성읍이었다는 사실은 아셀 지파가 악고나 그 밖의 해상 무역의 도시들을 점령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삿1:31) 다윗왕 시대의 얼마 동안을 제외하고 악고와 두로는 앗시리아에 정복당할 때까지 길게 뻗은 연안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수백 가지 인장과 갑충석과 황소머리모양의 몇 개의 도장들은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속국이면서도 악고가 해상무역을 상당히 복구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BC 4세기 무렵에는 악고에 아테네 상인들도 하나의 부락을 이루고 살았으며, 두로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당한 후 헬레니즘시대 초기에 급격히 확장되었다. 한편 BC 3세기경에 악고(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BC 281년에 그곳을 함락한 후부터 '프톨레마이스'로 불리어 졌음)는 적어도 이전의 갑절 이상으로 확장되어 해안선의 서쪽까지 뻗어 나갔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새로운 항구가 세워졌으며,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주요한 병참기지(兵站基地 ; 또는 병기고(兵器庫))가 되었다. 페니키아를 점령하려는 두 나라 사이의 싸움 때문에 악고는 점령당하지 않았다. BC 2세기에 새 성벽이 세워졌는데, 이는 분명히 만(灣)의 맨 끝에 있는 반도를 에워쌌으며, 언덕(tell)을 바깥으로 하여 건설되었다.
아랍의 정복이 끝난 후(AD 636년), 악고는 그 지역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십자군 시대 특히 13세기 이후에는 다시 확대되어 그 중요성을 되찾게 되었는데, 이것은 성지(聖地)로 들어가는 주요한 항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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