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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호서신학제 신학강연(1998. 11. 2)

성서고고학과 구약성서해석
- Tel Miqne-Ekron 발굴을 중심으로 -

임 태 수(호서대학 교수)

내게 주어진 "성서고고학과 구약성서해석"이란 제목은 대단히 그 범위가 넓고 방대한 제목이다. 주어진 제목이 요구 하는 대로 충실한 강연을 하려면, 다시말하면 성서고고학이 구약성서해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들을 다 언급하려면 지금까지 발굴된 모든 발굴결과들을 다 열거하고, 그 발굴들이 구약성서해석에 끼친 영향들을 일일이 다루어야 할만큼 이 주제의 범위는 넓고 크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의 요구를 필자는 다 감당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주어진 시간 안에 이 방대한 문제 를 다 다룬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둘째, 더 중요한 이유는 필자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오늘은 최근 성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인 발굴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큰 성과로 평가받고 있는 Tel Miqne-Ekron의 발굴결과 와 그것이 구약성서해석에 끼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하여 말하므로써 성서고고학이 구약성서해석에 얼마나 중요하며, 큰 영향을 끼 칠 수 있는가의 한 예를 말하는 것으로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대신하려고 한다. 

1.성서고고학(Biblical Archaeology)의 약사 
.이 부분은 The New Encyclopedia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 (NEAEH) Vol. 1, ix-x을 주로 참고하여 요약하였다.

1)외국 주도하의 초기발굴들(1948년까지)
성서고고학의 범위는 고대 근동지역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까지, 그리고 구소련 남방으로부터 아라비아반 도 남단에 이르기까지 성서와 관련된 모든 지역을 포함한다(W. F. Albright). 그러나 성서고고학의 중심은 "성지고고학 "(Arcaheology of the Holy Land 또는 Palestinian Archaeology)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성서고고학(성지고고학)의 역사 를 간단히 살펴 보고자 한다.
성지에 대한 탐구의 일차적인 동기는 성서에 기록된 장소와 사건에 대한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의 깊은 종교적 관심에서 부터 유래한다. 주전 1세기에 유다를 다스린 헤롯은 헤브론에 있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무덤을 정비하고 잘 보존하도록 지시 하였다. 주후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의 신앙심이 독실한 어머니 헬레나(Helena)는 정확한 예수의 출생장소와 무덤을 찾기 위하여 예수살렘과 베들레헴을 철저히 탐사하도록 하고 이 일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7세기 후반에 우마야드(Umayyad)의 칼리프 아 브드 알-말릭('Abd al-Malik)은 헤롯 성전터를 철저히 탐사하고 보수하도록 지시하였다. 십자군 시대(1099-1291)에 유럽의 기사, 수도사, 귀족들은 오랫동안 잊혀진 성서시대의 유적들을 찾기 위하여 성지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보다 더 조직적인 탐사가 이루어진 것은 마멜룩(Mameluke) 시대(1291-1517)였다. 이 시대에는 세속적인 탐구가 종교적인 열정을 대신하였다. 오토만(Otto man) 시대(1517-1917) 후반기에 들어서서 성지에 대한 보다 더 진지하고 발전된 연구와 탐사가 진행되었다. 유럽과의 밀접한 경 제적, 외교적 관계가 성립됨으로써 유럽의 많은 성직자들, 학자들, 그리고 탐사자들이 성지에 도착하여 성지에 대한 연구와 탐사 를 수행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서 성지고고학협회들이 결성되고 대대적인 발굴이 수행됨으로써 성지고고학은 현대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지에 대한 초기 발굴들은 종교적 유물이나 예술품을 찾기 위한 개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불란서 모험가 Laurent D'Arv ieux의 가자(1659), Hester Stanhope 부인의 아스글론(1815), Louis-Felicien De Saulcy의 예루살렘 '왕들의 무덤'(Tombs o f the Kings:1863) 등의 발굴은 체계적인 발굴이라기 보다는 개인들에 의하여 자행된 도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성지고 고학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들로는 나폴레옹의 정벌군을 수행한 Pierre Jacotin(1799), Edward Robinson(1838, 1852), Vi ctor Guerin(1854, 1863), Charles Wilson(1865) 등이 있다. 그들은 지도 제작자들이며 역사 지리학자들로서 성서지리와 지 형학(topography)의 체계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발굴현장 고고학의 발전이 이룩되었다. Charles Warren의 예루살렘 성전산 주변에 대한 조직적인 발 굴(1867-1870)은 박물관에 전시할 유물들을 수집하기에 급급한 발굴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발굴과정과 결과를 주의깊고 정 확하게 기록하기 시작한 첫번째 발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옛 모압 지역인 디반(Dhiban) 근처에서의 메사비석(Mesha S tela:1868), 예루살렘에서의 실로암 비문(1881) 등의 발견, 고대 히브리어가 씌어진 토기조각들의 발견과 이에 대한 연구는 셈어 로 쓰인 비문들을 연구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1890년에 W.M.F. Petrie는 유다 남쪽에서 Tell el- esi 
.Tell el- esi는 Lachi s 혹은 Ekron 중 어느 하나일 것이라고 추정되었으나 이 둘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님이 밝혀졌다. 
를 발굴했는데, 그는 이 발굴을 통하여 주거층법(stratigraphy)과 토기유형학(pottery typology)을 체계화함으로써 고대 근동의 Tel(아랍어로는 Tell:사람들이 오랫동안 살아서 형성된 작은 언덕)의 역사를 재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성지고고학은 잇따 른 유럽의 고고학협회(archeological societies)들의 설립으로 크게 고무되었다. 영국의 Palestine Exploration Fund(1865), 독 일의 German Palastina Verein(1878), 프랑스의 Ecole Biblique et Archeologique(1890), 미국의 American Schoo ls of Oriental Research(1900) 등이 그들이다. 강대국들이 이와같이 협회를 발족시킨 배경에는 붕괴되어 가는 오토만 제국에서 그들의 전략적인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숨어 있었다. 이들 각국이 관심하고 집중한 지역들이 각기 달랐는데, 영국 은 주로 이스라엘 남쪽과 시나이 반도, 미국은 트랜스 요르단 지역, 프랑스는 예루살렘, 독일은 북쪽의 이스르엘 평원과 갈릴리 지역에 집중하였다.
일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이후 성지고고학은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중앙집중화된 효율적인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과 함께 발달된 교통과 통신의 도움을 힙입어 성지고고학은 세계고고학계에서 가장 활기있게 활동하는 고 고학이 되었다. 1928년에 고고학법(Antiquities Law)이 제정된 이후 고고학 발굴지들의 명단이 작성되었고, 고고학 발굴 작업의 표준이 확정되었다. 1935년에는 예루살렘에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후에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록펠러 박물관으로 개칭)이 건 설된 이후 이곳에 연구소, 저장실, 전시실 등이 갖춰져서 고고학 발굴의 중심지가 되었고 성지고고학 발굴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국제적인 학자들의 협력이었다. 1922년에 세계 각국 대학의 고고학계의 대표들이 예루 살렘에 모여서 여러번의 회의를 거쳐서 연대용어(chronological terminology)에 대한 이중체계(two-tiered system)를 고안해 냈 는데, 인종과 종교-문화현상에 따라 붙여진 이름인 가나안, 이스라엘, 헬라, 로마, 비잔틴, 아랍 등의 문화-역사적 시대구분법과 , 유럽에서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알려진 시대구분법을 병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시기에 특히 많은 영향을 끼친 학자는 미국의 W. F. Albright였다. 그는 고고학을 보수적인 성서읽기를 뒷받침해 주는 도구 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는 토기와 주거층의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족장사의 역사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고 이스라엘의 단기 간에 걸친 가나안 점령기사가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수십년간 성지 고고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양차 세계대전의 중간시기는 성지고고학 발굴의 황금시대로 불리운다. 이 기간 동안에 외국의 도움으로 수행된 중요한 발굴과 그 후원기관은 대강 다음과 같다: Palestine Exploration Fund의 아스글론과 사마리아(1920-21), 쉬카고 대학 Oriental Institut e의 므깃도(1925-39), 펜실바니아 대학의 벳샨(1921-33),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의 Tell Beit Mirsim(1926-32), W.M.F. Petrie의 Tell Jemmeh(1926-27), Tell el-Far'ah(1928-30), Tell el-'Ajjul(1937-38), 그리고 Wellcome-Marston Expedit ion의 Lachis(1932-38)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고고학 발굴은 1936-39년 사이에 발생한 아랍인들의 폭동과 제2차 세계대 전의 발발로 인하여 중단될 수 밖에 없었으며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이 발굴이 진행될 수 있었다.

2) 팔레스타인 내에서의 고고학 발굴과 연구(1913-1967)
일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팔레스타인 내에서 고대유물(antiquities)에 대한 관심이 점차적으로 고양되고 있었다. 고대유물에 관 심을 갖는 사람들 대부분은 여행안내자나 유물 판매상들로서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관심을 가졌다. 소수만이 새로운 지적인 영 향과 민족적 자의식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이들 소수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에 사는 소수의 교사들에 의하여 1912년에 설립된 Jewish Palestine Exploration Society의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1920-21년 겨울에 Hammath-Tiberias 발 굴을 수행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제3성벽(1925-28), Beth Alpha의 옛 회당(1929), Beth She'arim의 묘지(1940) 등을 연이어 발굴했는데, 그들의 이러한 활동은 팔레스타인에 사는 소수의 유대인공동체에 고고학에 대한 관심에 불을 붙였다. 뿐만 아니라 1935년에 히브리 대학에 고고학과가 신설되어서 팔레스타인 고고학 전문가들을 훈련하는데 크개 기여하였다. 반면에 팔레 스타인에 사는 기독교와 이슬람 지식인들은 인종학(ethnology), 이슬람 예술, 문헌, 역사 등에만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현 장 발굴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함으로써 성지는 요르단과 이스라엘로 양분되었고, 그 결과 양국간의 고고학적 협력은 불가능하게 되었 다. 요르단(West Bank는 요르단에 속함)에서의 발굴은 주로 외국인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들이 American Scho ols of Oriental Research의 Tell Balatah(1956-1964), British School of Archaeology의 여리고(1952-58)과 예루살렘(1961 -67), Ecole Biblique의 Tell el-Far'ah(1946-60)와 Khirbet Qumran(1951-56)의 발굴이다. Qumran과 그 일대에서 발견된 사 해사본(1947-56)은 대부분이 불법적인 도굴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사본들은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 되어 국제적인 성서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고고학은 정부나 공사립 연구소들에 의하여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한 이후 2개월이 지나서 고대유물과(Department of Antiquities)가 교육문화부 안에 설치되었고, 곧 이어서 Benjamin Mazar의 감독하에 텔아비브 근처의 Tell Qasile이 발굴되었다. 1950년대에는 Israel Exporation Society가 발굴작업을 주도하고 고고학에 관한 국 제적인 강연과 회의들을 개최하였고, 자원종사자들을 전세계에서 모집하여 발굴에 참여케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Yigal Yadin의 Hazor(1955-58)의 발굴을 위시하여 아스돗, 아랏, 게셀 등 구약성서에 나타난 장소들과, 가이사랴, 'Advat 등이 발굴되었다. 세 계대전 이후에 수행된 발굴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유다광야 발굴(1960-61)과 Yadin이 주도한 마사다의 발굴(1963-65) 이었는데 여기에서 발견된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로마에 저항한 제1, 제2의 유대반란(Jewish Revolt)의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고고학계를 넘어서 세계적인 관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이 시기의 성지에서의 고고학 작업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나타난 미국의 신고고학(New Archaeology) 
.신고고학이란 방법론적 으로 Inter(multi)-disciplineray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서 지질학자, 식물학자, 생태학자,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팀을 이 루어 함께 발굴작업에 참여하고 연구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고고학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는 것 뿐만 아니라, 고대인들의 경험세계 전체, 즉 문화현상 전체를 재구성하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박준서, "구약과 성서고고학", 제27 회 연세신학공개강좌 개요(1985. 10. 31), P.4; William G. Dever, Archaeology, Syro-Palestinian and Biblical, ABD Vo l.1, Pp.355-6 참고. 
의 혁명적인 이론의 영향은 거의 받지 않았다. 계속적인 발굴기술의 개선, 탄소동화 측정방법(radiocarbon dating), 기원출처에 대한 화학적 조사방법, 그리고 지질학적, 식물학적, 동물학적 분석 등 복합적인 연대측정과정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의 고고 학 발굴작업을 세계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기법을 가진 것으로 발전시켰다. 이스라엘의 발굴은 건축물의 주거층방법에 집중한 반면, 미국의 발굴은 성서역사를 밝히기 위하여 주거층방법을 통한 연대측정에 집중하였다.
3)최근의 이론적 방법론적 발전(1967 년 이후)
1967년 6월 전쟁 이후에 성지의 고고학은 다시 한번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요르단 서안(West Bank)을 이스라엘이 점령함 으로써 이 지역이 모두 이스라엘의 관할하에 들어오게 되었고, 예루살렘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6월 전쟁 이후에 예루살렘의 주요 지역들이 발굴되었는데, Mazar의 성전산 발굴, Nahman Avigad의 유대인 지역(Jewish Quarter)발굴, Yigal Shilo의 다윗성 발굴등 이 이루어졌다. 6일 전쟁 이후에 요르단 강 양쪽 모두에서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구석기시대로부터 오토만 시대에 이르기까 지의 지층들을 조사하였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작업은 전국 곳곳을 철저히 조사하기 사작한 것인데, 이 조사는 성지고고학에 인구통계학 이론과, 사회과학에서 시작된 주거형태모델을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지난 20여년 동안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고고학 관련 기관들은 엄청나게 그 숫자가 불어났다. 그리고 지층탐 사 레이다, 지질학적 정보장치, 위성사진술 등 발달된 발굴방법들이 고고학에 대대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하이파 대 학, 벤구리온 대학, Bar-Ilan 대학 등에 고고학과가 신설되어 이미 설됩된 예루살렘 대학, 텔아비브 대학과 함께 고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중요한 지역들을 발굴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다국적 컨소시엄이 조직되어 Tel Sera', Tell el- esi, Lahav, Ashkelon, Tel Miqne, Lachish, Aphek, Caesarea, Dor, Acco 등을 발굴하였다. 요르단에서는 요르단 대학과 Ya rmuk 대학에 고고학과가 설립되고, 정부의 문화자산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어 Pella, Gerasa, Petra 등 발굴을 위하여 국제적인 프로젝트를 주도하여 발굴하였다. 뿐만 아니라 요르단 서안에 있는 팔레스타인 아랍 대학들에서도 고고학발굴에 대한 작업이 진 행되었다.
성지의 고고학은 주로 성서시대와 고전시대(classical periods)에 그 관심과 발굴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선사시대(특히 현대인간 출현과 농업발전과 관련한)에 대한 발굴도 괄목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직도 발굴해야 할 지역들은 많이 남아 있다. 본격적인 발굴은 이제 그 시작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2세기 동안의 성지의 고고학발굴을 되돌아 볼 때, 지구 다른 어느 곳에서도 성지에서 만큼 많은 발굴이 수행되거나, 그 결과가 잘 출판되고 문서로 정리된 곳은 아 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Petrie가 Tell esi를 발굴한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 과거를 되돌아보면, 성지에서의 발굴을 위한 국제적인 학자들의 협력의 중가로 인하여 성지의 고대문명에 대한 이해는 에게, 아나톨리아, 고전, 인류학에 기반을 둔 고고학의 발전의 도움도 받으면서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에그론 발굴이 구약성서해석에 주는 의미
성서고고학은 성서해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가령 1947년의 쿰란에서의 사해사본 발굴은 구약성서 사본의 역사를 1000여년이나 앞당긴 쾌거였다. 특히 사해사본은 히브리성서 본문 연구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또 1887년 카이로 남쪽 300여Km에 있는 Tel Amarna에서 발굴된 아마르나 문서는 주전 15-14세기의 팔레스타 인의 상황을 말해주는 문서로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과정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이 문서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외부에서 단기간에 무력으로 정복한 정복설, 혹은 장기간에 걸친 외부로부터의 이주설만이 주장되었으나, 이 문서 발견이후에 이에 의존하여 G. E. Mendenhall, N. K. Gottwald 같은 학자들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은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이주나 정복보 다는 가나안 자체 안에 있는 하비루/아피루들의 봉기(revolt)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학설을 발표하게 되었다. 물론 이 봉기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봉기설은 일방적인 외부로부터의 가나안 유입설, 정복설만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보완해 주는 충분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나안 정착설과 관련하여 획기 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외에도 족장시대상을 밝혀준 Nuzi, Mari 문서의 발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새겨 진 Merneptah 비석의 발견, 북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의 이름과 그 당시의 역사의 일부를 말해주는 모압석비(Moabite Stone)의 발 견(1868), 아합 당시의 역사를 밝혀주는 사마리아 성의 발굴, 히스기야 터널공사 과정을 말해 주는 실로암 비문, 다윗의 예루살 렘 점령의 비밀을 말해 주는 수구(Warren's Shaft)의 발굴 등 그 예를 다 들 수 없으리만큼 많이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서두에 서 말한 바와 같이 오늘은 최근 성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인 발굴들 가운데서 가장 큰 성과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Tel Mi qne-Ekron의 발굴결과와 그것이 구약성서해석에 끼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하여 말하므로써 성서고고학이 구약성서해석에 얼마나 중 요하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의 한 예를 말하는 것으로 국한하려고 한다.

1)Ekron의 역사 
.Seymour Gitin, Tel Miqne-Ekron in the 7th Century B.E.E.: The Impact of Economic Innovation and Foreign Cultural Influences on a Neo-Assyrian Vassal City-State, Recent Excavations in Israel(Archaeological Institute of America, Colloquia & Conference Papers No.1 1995), Pp. 61-79; Seymour Gitin, Last Days of the Philistines, Archa eology, May/June, 1992, Pp.26-31; T. Dothan/S.Gitin, Miqne, Tel(Ekron), The New Encyclopedia of Archaeological Ex cavations in the Holy Land(NEAEH) Vol. 3, Pp. 1051-1059 참고.

Tel Miqne는 예루살렘 동서쪽 35Km에 위치해 있으며 아랫쪽 Tel은 40 에이커, 윗쪽 Tel은 10 에이커 정도 된다. 해발 108.25 m다. 1924년에 이 지역을 답사한 W.F.Albright는 Tel Miqne를 단 지파에 속한 Eltekeh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7년에 이곳을 방문한 Naveh는 이곳이 성서시대의 에그론일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이후 여러 다른 주장들이 있었으나 건축, 토기, 지정학적 조건 등으로 보아 Naveh의 주장이 옳을 것이라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이곳이 에그론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만한 자체 발 굴물은 1996년이 절반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 발굴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Tel Miqne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동후원하에 1981년 W.F.Albright Institute of Archaeological Resear ch의 S. Gitin교수와 Hebrew University of Jeruslaem의 T. Dothan교수 감독으로 1981년에 시작되어 1996년까지 일차발굴을 마감 하였다. 발굴결과 동석기시대(Chalcolithic Period)로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들이 골고루 발굴되었다. 
에그론은 아스돗, 가드, 아스글론, 가사 등과 함께 불레셋의 다섯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였다(수 13:2-3). 사사기 1:18에 의하 면 에그론은 유다가 점령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나, 1:19에서는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 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LXX 1:18에서는 "유다가 불레셋 도시들을 점령하지 못하였다"고 수정하였 다. 에그론을 유다에 소속시키고 있는 것은 아마도 히스기야시대(주전 8세기)의 정황을 반영하는 것 같다. 수 19:43에서는 에그 론을 단 지파에 소속시키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다윗-솔로몬 시대(주전 10세기)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사사시대인 엘 리 제사장 시대에 이스라엘이 불레셋과 전쟁할 때에 법궤를 가지고 나가 싸우다가 빼앗긴 일이 있는데, 그 때에 법궤가 아스돗을 지나 에그론에 이르러 재앙을 가져왔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15:10-11).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에 불레셋 사람들이 도망가 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쫓아가 에글론 성문까지 이르렀다(삼상 17:52). 주전 9세기에 이스라엘왕 아하시야는 그가 병들자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었다(왕하 1:2-3). 8세기의 예언자 아모스는 에그론의 멸망을 예언하였다(암 1:8).
성서 밖의 자료로서는 주전 712년에 앗시리아왕 사르곤 2세가 에그론을 점령한 그림이 Khorsabad 궁전 벽에 부조로 새겨져 있 는 것이 발굴되었다. 왕들의 연대기(royal annals)는 주전 701년에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이 유다왕 히스기야에 의해 주도된 반란 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에그론의 왕 파디(Padi)를 복위시킨 이야기, 또 에살핫돈 왕이 에그론 왕 이카우수(Ikausu)를 불러서 니느 웨 궁전을 짓기 위한 물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7세기 후반에는 다섯 도시 가운데 가드가 빠지고 네 도시들만이 언급되고 있는데,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이 도시들은 이 때 파괴도었다(렘 25:20; 습 2:4; 슥 9:5-7). 에그론은 주전 603년에 바빌론 왕 느부갓네셀에게 파괴되었다고 바빌론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2)Ekron 비문 발견 
.이 부분은 The New York Times, Tuesday, July 23, 1996에 실린 "Inscription at Philistine Ci ty: Theis Is the Place"와 Los Angeles Times, Thursday, March 13, 1997에 실린 "Archaeologists Rewriting Definition of a Philistine"을 참고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Tel Miqne가 성서에 나오는 에그론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었지만 이를 뒷받침해 줄만한 아무런 직접적인 단서도 발견하지 못하고 16년에 걸친 발굴을 마무리 지으려 할 무렵인 1996년 7월 10일에 Tel Miqne에서 한 비문이 발견되었다. S. Gitin 교수는 이 날 Tel Miqne에서 기둥들이 늘어서 있는 건물 입구 가까이에문이서 한 큰 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돌에서 아무런 글씨도 발견할 수 없어 실망하였다. 그러나 그 돌에서 흙덩이리들을 털어내자 페니키아 글씨로 씌어진 다섯 줄의 비문이 드러났다. 모두 69자 정도 되었다. 이 비문은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는 않았지만, 파디 (Padi)의 아들 아기스(Achish)가 여신을 위하여 이 신전을 지었으며 "에그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Ekr on)이라고 씌어진 글씨가 확인되었다. 이것은 성서고고학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고고학 발굴 에서 한 장소를 정확히 확인시켜 주는 비문이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 비문의 첫 수확은 불레셋 언어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가나안 언어를 사용하였는데, 이스라엘 사람들과 의 사를 소통하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와 페니키아어는 가나안어의 파생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자들 은 이 비문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불레셋 언어가 분명하다는 것을 밝혀줄 어떠한 비문이나 글씨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번에 그 불레셋의 언어임이 분명한 글씨를 발견한 것이다. 이는 성서고고학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일뿐만 아니라 구약성서를 해석 함에 있어서, 특히 불레셋을 이해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비문을 일차적으로 분석한 S. G itin 교수는 불레셋 사람들은 문자 뿐만 아니라 언어도 페니키아의 언어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하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불레셋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는 페니키아어에서 조금 변형된 언어가 아니었을까 추정하였다. 에그론에서 발견된 문자들의 특성를 종합해 보면 그들의 문자는 고대 히브리어나 페니키아어에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비문에 대 한 보다 면밀한 해독을 위하여 S. Gitin과 Trude Dothan 등이 현재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이 비문에 나타난 에그론 왕 '아기스'(Achish)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아기스(삼하 21:10; 왕상 2:39)가 아니라, 위에서 언급 한 왕들의 연대기(royal annals)에 기록된 에그론 왕 '이카우수'(Ikausu)와 동일인이다. 이 비문은 이 도시의 풍요를 말해 주는 데, 그 이유는 이 비문이 왕궁 서쪽에 새 신전을 건축한 것을 축하하고 있으며, 이 신전의 모양은 신앗시리아의 건축 양식을 따 르고 있으며, 이스라엘에서 발굴된 동일한 양식의 신전들 가운데 가장 큰 것 가운데 하나에 속하기 때문이다. 

3)올리브 공장과 제단 발굴 
.Seymour Gitin, Tel Miqne-Ekron in the 7th Century B.E.E.: The Impact of Economic Innovation a nd Foreign Cultural Influences on a Neo-Assyrian Vassal City-State, Recent Excavations in Israel(Archaeological I nstitute of America, Colloquia & Conference Papers No.1 1995), Pp. 61-79; Seymour Gitin, Last Days of the Philistine s, Archaeology, May/June, 1992, Pp.26-31; T. Dothan/S.Gitin, Miqne, Tel(Ekron), The New Encyclopedia of Archae 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NEAEH) Vol. 3, Pp. 1051-1059 참고.

에그론은 주전 603년에 파괴된 다음에 아무도 그 폐허 위에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전체 도시의 3-4% 밖에 발굴 하지 않았지만 발굴한 팀은 이 도시의 600년의 전역사를 일목요연하게 그릴수 있었다. 지중해에서 이주해온 불레셋 사람들은 이 가나안 도시를 점령하고 새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들은 흙벽돌로 성벽을 쌓고 집을 짓고 성벽 가까이에는 토기를 굽기 위한 가마 를 지었다. 주전 10세기경에 에그론은 대대적으로 파괴되어 10 에이커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아마도 다윗 군대에게 파괴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이 때 다른 해양민족들은 이 시기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불레셋 민족만은 살아남아 그들의 고유한 전통을 이어 갔다. 그 이후 그들은 조용히 남아 있다가, 주전 8세기에 앗시리아 제국이 나타나 세계 최초의 대제국을 형성하고 새로운 세계 경제제도를 만들자 이 경제제도에 편승하여 갑자기 번성하기 시작하여 85 에이커 정도로 확장되었다. 
지금까지의 발굴결과를 종합해 보면, 에그론은 7세기에 10 에이커 정도의 작은 도시에서 85 에이커의 큰 도시로 급속히 발전 하였으며 중앙에는 귀족들이 사는 지역(elite quarter)이 있고, 그 주위에 105개 정도의 올리브유(olive-oil) 생산설비를 갖춘 산업지역(industrial quarter)이 자리잡고 있었다. Gitin교수는 에그론의 발굴과 이 비문의 발견으로 앗시리아 제국의 역사와 이 제국의 혁명적인 경제발전의 역사를 확신을 가지고 쓸 수 있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7세기의 에그론은 앗시리아의 봉신국(vass al city-state)이었고 에그론이 앗시리아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니느웨에 수도를 정한 앗 시리아는 남쪽으로는 이집트에서부터 시리아, 지금의 이라크 지역, 터키와 이란의 일부까지 지배하였다. 앗시리아 제국의 페니키 아 상인들은 두로와 시돈 항구를 중심으로 칼타고와 시실리,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까지도 왕래하였다. 
원료와 제품생산을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통화수단이 된 은을 공급받기 위하여 앗시리아는 정치적, 경제적 초강대국인 신제국 을 건설하였다. 그들은 소규모 생산방법을 대량생산시설로 바꾸어 특수제품을 집중적으로 생산하도록 하였다. 그 대표적인 대량 생산시설을 에그론에서 볼 수 있다고 Gitin 박사는 확신한다. Gitin 박사는 한 논문에서 이 불레셋 도시는 "그 지리적, 지 정학적 잇점 때문에, 특히 원료확보의 용이성과 지중해 항구에 가깝다는 점 때문에 앗시라아 제국의 경제활동의 중심지로 선택되 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 발굴에 참가한 고고학자들은 특히 에그론의 올리브유 생산공장의 크기에 놀랐다. 에그론의 3-4% 밖에 발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돌압착기, 저장항아리, 그리고 다른 기구들과 함께 105개의 올리브 생산공장들이 발굴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그 크기를 능히 짐작할만하며 그들의 감탄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발굴 참가자들은 발굴된 생산시설과 같은 크기의 시설을 만들어 실험해 보았는데, 일년 생산량이 1,000톤, 즉 290,000갤론이나 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양은 현재 이스라엘의 일년 수출물량의 20%에 해당하는 양으로서 막대한 양이다. 이 양은 20리터들 이 항아리 48,000개를 채울 수 있는 양이고, 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12,500 에이커의 땅이 필요하고, 2,000명의 노동자가 있어 야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 이와 같은 많은 양은 에그론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앗시리아 제국 전지역에 수출하기 위한 대량생 산이었다. "이것은 앗시리아가 한 곳에서 한 품종을 대량생산하도록 정책을 개발한 대표적인 예"라고 Gitin 박사는 말 한다. 또 다른 대량 품목은 직물(textile) 생산이었다. 이 직물 또한 외국에의 수출을 목적으로 한 생산이었다. 에그론 폐허에서 앗시리아의 토기 잔과 병들이 발견되었고, 그리스와 칼타고의 토기들, 다량의 은과 보석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페니키아의 종교제의 기구들도 발견되었다. 에그론에서 네 뿔이 달린 제단(four-horned altar) 
.Seymour Git in, Incense Altars from Ekron, Israel and Judah: Contxt and Typolgy, Eretz Israel, Vol.20, Pp. 51-67; idem, Seven th Century B.C.E. Cultic Elements at Ekron, Biblical Archaeology Today, 1990, Pp. 248-258 참고.
이 14개나 발굴되었다. 이와 같이 한 굿에서 많은 제단이 발견된 것은 고대 근동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아마도 이 제단들은 가 정, 일터, 그리고 신전에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네 뿔이 달린 제단은 주전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러한 제단은 이스라 엘의 제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 와서는 유다나 이스라엘에서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오직 에그론에서만 발견된 것이다. 짐작컨데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망한 다음 그 제단 기술자들이 에그론으로 유입되어 만든 것 이 아닌가 추정한다. 그 경로야 어떻든 이스라엘의 네 뿔달린 제단이 에그론에 소개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에그론에서 발견된 한 큰 저장 항아리에는 잉크로 qds l'asrt "(페니키아의 여신) 아세라에게 봉헌됨"이라고 씌어진 것이 발견되었고, 또 다른 대접(bowl)에는 bn 'nt "(여신) 아낫의 아들"이라는 글씨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에그론의 만신전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앗시리아가 개발한 또 하나의 제도는 은을 통화(通貨)의 수단으로 채용하여 물건이 나 노동봉사(service)로 지불하던 지불방식을 일부 보완하거나 대체하도록 한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이러한 용도로 대량으로 필 요한 은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하여 새로운 은광을 개발하였다. 에그론에서 네 무더기의 은이 대량으로 매몰되어 있는 것을 발견 하였다. 일부는 조리용 항아리에, 일부는 큰 돌 밑 구멍에 숨겨져 있었다. 
학자들은 에그론 발굴에 대하여 찬탄하고 또 Gitin 박사의 주장을 대체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앗시리아가 이러한 대량생산제도 를 고안해내서 제국의 경제를 활성화시켰고, 에그론이 그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고 주장하는 Gitin 박사의 주장에 대하여 너무 과장한 것이 아니냐 하고 조심스럽게 회의를 표명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발견과 주장은 너무 새롭고 놀라운 것이기 때문 이요 다른 곳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두로와 시돈 등이 에그론 보다는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지 않느냐 고 주장한다. 
에그론의 영화는 앗시리아 제국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잠깐 동안이었다. 7세기 말에 이집트와 바빌론이 제국에서 일차적으로 떨 어져 나간 다음 바빌론이 612년에 니느웨를 점령하여 앗시리아 제국을 멸망시키자 이와 함께 70여년의 에그론의 영화도 끝이 났 다. 에그론도 603년에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함락당했고, 아기스 왕의 호화로운 궁전도 폐허로 변하고 말았으며 산업시설 들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멸망한 불레셋은 그 이후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그들은 주변 민족들 속에 동화되고 흡수되고 말았던 것 같다. 이와 같이 그들이 한 번 망하자 완전히 사라진 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계속 지탱 할만한 핵심 문화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Gitin 박사는 추측한다. 멸망한 앗시리아 제국에 뒤이어 바빌론, 페 르시아, 그리스, 로마제국이 차례로 나타나 고대 근동의 맹주가 되었다.

3.종합결론
이상에서 에그론 발굴의 중요한 결과들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했는데, 이러한 발굴결과를 통해서 우리는 앗시리아와 불레셋 에 대한 해석, 특히 불레셋에 대한 구약성서해석을 새로이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첫째, 이번 발굴을 통해서 발견한 에그론의 새로운 사실은 당시 불레셋은 결코 구약성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거칠고 조잡한(ru de and crude) 민족이 아니라, 고도로 세련되고(sophisticated) 활기에 넘친 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Gitin 박사는 이러한 사실 에 근거하여 "불레셋은 교양없는 사람들이 아니다"(The Philistines were not philistines)라고 결론지어 말했다. 그 들은 성서에서 그들의 적인 이스라엘에 의하여 부정적으로 혹평을 받고 있지만, 에그론에 살았던 불레셋 사람들은 주전 7세기에 앗시리아 제국 내에서 중요한 산업도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찬란하고 풍부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지적으로 매우 우수하였다. "우리는 아마도 Webster 사전에서 'philistine'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던지, 아니면 그 의미를 대폭적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라고 Gitin 박사는 말했다. 영어사전에서 소문자 'philistine'은 "속물, 교양이나 세련미가 없고 또 이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경멸받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그만큼 지금까지 불레셋은 천박한 사람들로 경멸하여 왔는데, 이번 에그론 발굴을 통하여 그러한 우리의 인식이 전적으로 잘못 되었으므로,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주장하는 Gitin 박사이다.
둘째, 이번 비문에 기록된 불레셋이 사용한 문자를 확인한 것은 불레셋을 이해하는데 큰 소득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지금까지 는 불레셋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가 어떤 언어였는지 추측만 할 뿐이었는데, 이번 비문의 발견을 통하여 그 언어가 페니키아어, 혹은 이와 유사한 언어였고, 히브리어와도 상통할 수 있는 자매언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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