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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녹음기에 전기충격기도.. 요즘 젊은 남녀, 침대서도 못믿어

이영빈 기자 입력 2020.06.19. 03:17 수정 2020.06.19. 10:46 
 

[이영빈·안영의 뉴스 저격] "여성혐오 말라" "남성 역차별 억울".. 서로 미워하는 이남녀

#1.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는 책 아세요?" 대학생 손모(25·남)씨는 소개팅을 나갈 때마다 상대방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대답이 '그렇다'면 곧바로 경계 태세 돌입. 다음으로 책 내용에 공감한다거나 인상 깊은 대목을 털어놓기 시작하면 속으로 다짐한다. '다시 만날 필요는 없겠군.'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는 20대에겐 페미니즘 필독서처럼 통하는 책이다. 손씨는 그렇다고 페미니즘을 혐오하진 않는다. 다만 경험적으로 볼 때 페미니스트가 남성 혐오에 가까운 행태를 종종 보여 부담스럽다는 생각이다. 그는 "서로 생각이 확연하게 다르면 만나봤자 피곤하고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말했다.
 

#2. 직장인 나은지(25·여)씨는 지난 1년간 만난 남자들을 돌아보면서 '전 남친 일지'를 쓴다. 그들이 풀어놓은 말이나 행동으로 남자들이 얼마나 고루한지 점검하는 작업. 이런 일지가 있으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의 언행에서 '여성 혐오적 징후'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나씨는 전 남자 친구가 '아침밥은 여자가 차려야지' 같은 말을 내뱉었을 때도 별생각 없이 계속 만났으나 나중에 헤어지고 나니 "진작 눈치챌 수 있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고 전했다.

요즘 20대 남녀들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처럼 '사상 검증'을 벌이는 게 통과의례처럼 자리 잡고 있다. 내면에 잠재한 남녀 혐오 심리를 찾아내 향후 관계 설정에 나침반처럼 삼기 위해서다. 그동안 한국 사회 집단 갈등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주로 지역 갈등이나 세대 갈등이었다. 출신 지역이나 노소(老少) 대립이 사회문제로 비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남녀가 상대에 대한 차별 문제를 강조하는 '성(性) 갈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는 상황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남충(한국 남자는 벌레)' '김치녀(여자들 허영을 조롱하는 단어)' 같은 혐오성 성차별 단어는 일부 인터넷 공간에만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게시물이 곳곳에서 넘쳐나고 현실 공간까지 점령하고 있다.

18일 오후 1시 여성 이용자가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 '네이트판'에서 추천 2031회를 받은 베스트 게시물은 남성 음식 배달원이 이상한 행동을 해서 무섭다는 여성 처지를 호소한 내용이다. 반면 같은 시각 남성이 주로 이용하는 '디시인사이드 국내 야구 갤러리' 베스트 게시물(추천 1516회)은 어떤 여성이 부산시 인구가 감소한 이유를 여아 낙태라고 주장했다면서 조롱하는 내용이다.
 

'강성 페미니즘' 득세하며 공방 치열

성 갈등 '난타전'이 표면으로 드러난 시기는 2019년 초반이다. 처음으로 여론조사에서 20대 남성 국정 지지율이 30% 아래로 내려갔고, 20대 남성들이 인터넷을 통해 "정부의 여성 우대 정책에 역(逆)차별받고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이남자(이십대 남자) 현상'이다.

'이남자' 현상을 이해하려면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을 거쳐야 한다. 당시 서울 강남역 인근 한 노래방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조현병을 앓던 남성에게 흉기로 찔려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일부 여성이 이 사건을 '여성 혐오'라고 규정하면서 들고일어났다. 여성만을 노린 범죄였다는 것이다. 그 뒤 혜화역, 강남역 등에 1만2000여 여성이 모여 "여자라서 죽었다"고 외쳤고, '한남충' '소추소심'(한국 남자는 성기가 작고 소심하다) '재기해'(투신해서 죽어라) 등 과격한 말이 등장했다. '강성(强性)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세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유식 디시인사이드 대표는 "'워마드' '메갈리아' 같은 여성 인터넷 커뮤니티가 주도하면서 '된장녀' '김치녀' 등 2000년대 중반부터 당했던 여성 혐오를 되갚아 주자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정치권이 반응하면서 사태는 커져갔다. 2017년 당시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도 강남역 살인 사건을 예로 들며 "젠더 폭력을 눈감고 쉬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 등 남성 정치인들이 나서서 기성세대로서, 남성으로서 사과했다. 지하철 여성 배려 칸(2016년 6월)이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입됐고, '성 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법원 판결문(2018년 4월)도 나왔다.
 

'이남자'의 반격: 우리는 억울하다

유시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2018년 12월 "20대 남성들은 축구도 봐야 하고 '롤(LoL·게임)'도 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여성들은 공부를 하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2019년 2월 "(20대 남성들이 학교를 다닐 때) 제대로 된 교육이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까지 쏟아냈다.

'이남자'들은 "우경화되어 있다"는 분석도 있고, '조국 사태'에 반응하면서 "불합리에 가장 분노하는 세대"라는 지적도 나왔다. 반면 여권에서는 현 정부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이유로 "20대 여성들은 지금까지 차별로 억압받았는데, 20대 남성은 능력을 뛰어넘는 대우를 받았다"는 식으로 '이남자'들을 평가절하한다.

실제 만나본 '이남자'들 정서를 지배하는 단어는 '억울'이었다. "가만히 있는데 왜 두드려패느냐"(대학생 한정수) "취업은 남자와 여자 둘 다 힘든데, 왜 배려라면서 여자만 따로 뽑느냐"(취업 준비생 양모씨) 등이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8년 11월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금 20대 남성은 그 전 세대에 비해 전통적 남성성에 회의적이다. '가족의 생계 책임은 남자'라는 항목에 50대 남성은 70.8%가 동의한 반면, 20대 남성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33.1%만 '그렇다'고 했다.
 

해결 방법은 공정성 회복

20대 남녀는 대한민국 사회가 서로에게 불리하다고 여긴다. 20대 남성들은 "이미 기계적 평등이 완성됐으니, 여성 우대는 그만 해달라"고 주장한다. 2018년 9급 공무원 최종 합격자 중 여성의 비율은 60.5%. 2009년(51.5%)보다 9%포인트가량 올랐다. 그러나 여성들은 "'유리 천장'은 여전하고, 더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2018년 5급 이상 공무원 중 여성 비율은 5명 중 1명(21.8%)꼴이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여자(이십대 여자)'는 기성세대가 초래한 여성 혐오, '이남자'는 정부의 불합리한 여성 우대 기조에 분노하는 건데 엉뚱하게 그 화살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는 약자를 우대해주는 '기회의 평등'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데, 서로가 약자라고 여기며 벌어지는 싸움"이라며 "결국 20대 남녀가 '이 정도면 납득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를 정치권, 시민단체, 학계 등에서 지속적으로 찾아가야 한다"고 했다.
 

[폰 녹음 버튼 켜고, 전기 충격기 숨기고… 요즘 젊은 남녀, 침대서도 서로 못믿어]

2020년식 '성(性) 갈등'은 남녀 관계에서 특이한 현상을 낳고 있다. 극단적으로 "침대에 올라가서도 의심하라"는 게 불문율이다. 남자들은 합의하에 한 성관계라도 무고(誣告)를 대비해 스마트폰 녹음 기능을 활용해 증거를 확보한다. 여자들은 원치 않는 관계를 강요할 때를 대비해 전기 충격기 같은 호신용 무기를 침대 주변에 숨기는 방법을 소셜 미디어로 공유한다.

직장인 조모(28)씨는 여성과 잠자리를 가질 때 초반에는 스마트폰 녹음 기능을 반드시 켜둔다. 페이스북 등에서 여성들이 남성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무고한다는 게시물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의 합리적이고 일관된 진술만 있다면 별다른 증거 없이도 강간범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난 뒤로는 자구책으로 녹음을 한다"고 했다. 서울 모 경찰서 성폭력범죄 담당 A(43) 경감도 "남자가 쉽게 생각하고 여자랑 관계를 가지다간 자칫 쇠고랑 찰 수 있다"면서 "성폭행 혐의는 일단 구속영장을 치는 게 최근 흐름인데 '이런 건 구속은 좀 심한데…'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고 말했다.

불안한 건 여성도 마찬가지다. 대학생 B(여·22)씨는 올해 초 인터넷으로 전기 충격기 2개를 샀다. 인터넷 다음 카페 '여성시대'에서 '남자는 성욕 앞에서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 자기 몸은 자기가 보호해야 한다'는 글을 읽은 뒤였다. 하나는 본인 자취 집 매트리스 밑에 숨겨 두었다. 다른 하나는 핸드백에 넣고 다닌다. B씨는 "지금 남자친구와 1년을 만났지만, 그보다 오래 만나고도 데이트 폭행을 당하는 여성이 많다더라"고 했다. 실제로 온라인 쇼핑몰 G마켓에 따르면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호신용 전기 충격기 판매량이 느는 추세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성 갈등이 첨예하게 대두되면서 온갖 소문과 사실이 뒤섞여 20대 남녀들 사이에 불신 풍조가 깊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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