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되어야 할 부활(1)
부활, 무엇이 문제인가?
연재를 시작하며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지났다. 그를 묻고 돌아서던 날 온 천지엔 눈발이 흩날려 아득하더니, 아직도 내 마음속 응달엔 녹지 않은 잔설이 치워지지 못하고 있다. 꽃이 피어도 그를 보는 것 같고, 비가 내려도 옛 생각에 잠기곤 한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 싶을 정도로 맥을 놓을 때도 많다. 혼자라는 것이 참 낯설다. 어쩌다 밤늦게 외출하고 돌아와 문을 열면, 눈이 까만 외로움이 와락 안겨온다. 그래서 얼른 전등을 켠다. 그러나 온 방안이 하나 가득 비어있다.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틀고 볼륨을 높여본다. 그게 그나마 사람 소리다. 미루어 둔 설거지도 그 소리를 들으면서 한다. 누구의 조언대로, 암자에서 혼자 기거하는 늙은 수도승처럼 살아보려고 하지만, 그것도 마음 같지가 않다. 가고 없음이 이리도 절절할 수가 없다. 엇갈린 죽음과 삶이 그럴 수 없이 잔인하다. 
혼자 상상해본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 ‘아내의 부활’을 알려준다면 어떨까? “당신의 죽은 아내를 연신내 시장에서 본 사람이 있다더라.”하고 말한다면, 그 말이 곧이 들릴까? 그랬으면 오죽 좋으랴! 하지만 난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벌써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목사라도 이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한단 말이오?” 하고 윽박지르듯 들이대는 사람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죽은 자의 부활’이 ‘사후(死後)에 저 세상에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도 그렇다. 하루하루를 힘겨워하며 아내가 떠난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나에게, 그 ‘사후의 부활’은 너무 한가하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것이, 사후를 대비해서 들어두는 생명보험과 같은 것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죽은 아내도 생전에, ‘죽은 자의 부활’을 그렇게는 믿지 않았다. 성서가 말하는 ‘죽은 자의 부활’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그도 내 설교를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숨을 거두기 두 달 전, 병상을 지키는 나에게 유언처럼 남긴 말이 있다. “내가 아픈 것에 너무 매이지 말고 부활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하시오. 꼭 그래 주시오.” 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 말이, 일 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를 이렇게 책상 앞에 앉게 했다. 
‘아내의 부활’도 믿지 않는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려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죽은 자의 부활’이 ‘죽은 다음의 일’로 미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변증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부활’과 ‘성서가 말하는 부활’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를 함께 논구해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이것은, 부활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정도의 논의가 아니다.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차원을 이미 넘어선다. 단순히 교리의 차원에서만 논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 속의 한 신조(信條)’로만 읊조리는 정도의 부활이라면, 그런 부활은 기독교사상이라는 커다란 관념체계 속의 한 항목으로만 치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념에 대한 ‘맹목적 수용’이나 ‘지적인 동의’를 ‘부활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소박하게 말해서, 부활을 믿기만 하는 게 ‘부활 신앙’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부활을 믿어도 어떻게 믿느냐?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지고 있는가? 그걸 함께 묻고 더불어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지금까지의 부활 신앙에 대한 나름의 도전이요 신학적 반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개 목사가 달려들기에는 힘에 벅찬 작업이요 고독한 행보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나는 성서로부터 힘을 얻고, 거기 기록된 ‘사도적 증언’의 지원을 받을 것이다. 
누구누구의 부활관이 어떻고 하면서 유명한 신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는 식의 논의는, 이제 나에게 별의미가 없다. 바르트가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해도, 몰트만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희망의 신학’을 말해도,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게 있고 놓친 게 있음을 어렴풋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말해야겠다 싶어 이 글을 쓴다. ‘그들이 말하는 부활’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부활’을 해석해내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진정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 성서의 ‘부활 증언’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 부활을 믿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부활을 믿는다는 게 뭔지, 그리고 그런 믿음이 성서가 말하는 부활과 얼마나 합치하는지, 그걸 이제부터 함께 따져보자는 말이다. 
그러려면 독자들과 더불어 반드시 합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죽은 사람은 되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죽어 묻히셨다. 그런데도 성서는, 그렇게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쉬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을 겸허히 긍정하고 논의를 시작하자는 뜻이다. 이걸 솔직히 긍정할 수 있어야, 성서가 말하는 ‘부활 증언’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그 성서의 논리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힘든 부활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신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세 번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 앞에 전제되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예수님은 계속 내몰리신다. 마치 죽기로 작정한 분처럼, 기존체제와 충돌하신다. 그러니까 ‘죽음’을 예고하신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할 것을 이미 내다보셨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런데도 제자들의 무지는 여전히 어둠속이다. 죽는다는 소리에 기가 막혀서 그랬던지, 아니면 두려워서 그랬던지, 죽음과 함께 언급한 부활에 대해서는 묻는 제자 하나 없다.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막 8:31)면 왜 그래야 하는지, “삼일 후에 일어나야만(아니스테미) 할 것이다”라고 했으면 그게 무슨 소리인지, 물어야 마땅한데 도무지 깜깜하다. 
심지어 마가복음의 첨가 부분에 해당되는 16장 9절 이하를 보면, 이러한 제자들의 무지는 ‘불신앙’으로까지 이어진다. 막달라 마리아에 의해서 보여졌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고(막 16:11), 시골로 길을 떠난 두 제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가서 알려도 믿지 않는다.(막 16:12) 그래서 예수께서는 식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의 불신앙과 완고함을 비난하는 것으로(막 16:14) 그려져 있다. 물론 마가복음이 열두 제자들에 대해서 비판적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처음 제자들에게조차 ‘믿어지지 않는 부활’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마가복음에 있다. 변모산의 계시 다음 예수께서는, “인자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아니스테미) 때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명령하셨다.”(막 9:9)고 한다. 그러자 제자들은 비로소,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난다(아니스테미)는 것이 무엇인지를 논의하였다(쉬제테오)”(막 9:10)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 자신을 향해서 하신 그 로고스를 간직하였다(크라테오)”(막 9:10)고 한다.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라는 것을 밝히기 싫었던지, 마태와 누가는 그들 복음서에서 이 부분을 삭제하였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럴 수 없다. ‘부활이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최초의 부활 논의’가 제자들 사이에서도 있었구나 싶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만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 처음 제자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것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 처음 제자들이 그랬듯이, 어쩌면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 논의되어야 할 신학적 주제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마가는,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난다’는 이 말을 “그 로고스”라고 하면서, 교회에서 설교되어야 할 ‘로고스’임을 암시하고 있다. 더구나 이 ‘부활 로고스’가, “그들을 향해서(프로스) 하신 로고스”였다고 말하는 대목은(우리말 성경에는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그냥 흘려들을 말이 아니다. 이것이 ‘그들’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로고스였다면, 이 로고스는 오늘을 사는 ‘우리’와도 무관할 수 없다. 물론 앞으로 논의해가는 과정에서 밝혀질 말이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 또한 제자들처럼 이 ‘부활의 로고스’를 계속 붙잡고 늘어지듯이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부활은 ‘로고스’다. 예수께서 말하신 로고스요, 교회에서 계속 설교되어야 할 로고스다. 더구나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로고스이기도 하다면, 우리 역시 설교되는 그 로고스를 통하여 깨닫는 것이 있어야 마땅하다. 이해해야 설교도 하고, 알아야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사는 부활’이 아니라 ‘믿는 부활’로 이미 굳어져버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신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부활 논의’는 암묵적인 금기사항으로 치부되는 듯한 인상이 짙다. 잘못 말했다가 목이 달아나고 교수직에서도 쫓겨나는 전례(前例)를 보았기 때문일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사람을 살려야 할 부활 교리가 사람을 죽이는 구실로까지 전락했다면,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게 아니겠는가. 바로 여기에,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부활 신앙’을 재점검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있다. 

부활 신앙의 문제점 
목회를 하면서 오래 전부터 느껴온 의문이 있다. 부활이라는 것은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가 하는 의문이다. 많은 교인들에게 부활은, 믿어야 할 것 같아서 믿는, 그저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예수를 믿긴 해도 그의 부활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는 교인도 만나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부활을 믿어도 믿지 않아도, 그 사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가 않다. 이른바 신앙생활에서 달리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믿어도 그저 그렇게 살고, 믿지 않아도 그저 그렇게 산다. 그러면서도 버릇처럼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한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고, 입을 모아 암송한다. 외워서 입으로 고백할 뿐이다. 그야말로 사도신경에 나열되어 있는, ‘믿어야 할 것들’ 중의 한 항목에 불과하다. 이리되면 부활은, 하나의 ‘교리’로만 굳어질 수밖에 없고, ‘추상적인 관념’으로 떠돌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교인들을 행해서 부활을 설교해야 하는 목사는 오죽하겠는가. 매년 부활절마다 교인들을 믿게 하려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힘주어 설교한다. 한해는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빈 무덤 이야기’를 본문으로 택하고, 다음 해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목격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빙자료처럼 제시한다. 그러고는 해마다 고린도 전서 15장이나 여타의 본문으로 몇 년을 버틴다. 그렇게 한 십년을 설교하다보면, 부활을 설교할 본문도 동이 난다. 솔직히 말해, 해마다 해야 하는 부활절 설교가 연중고역(?)이다 싶기까지 하다. 해마다 부활절은 왜 그리도 어김없이 찾아오는지, 차라리 ‘교회력’이라는 게 없었더라면 싶다. 목회자 일반을 싸잡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지난 나의 목회경험에서 겪었던 고충의 한 자락을, 이제는 드러내도 좋을 나이가 되어서 이런다. 혹여 속으로는 공감하는 동료 목회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섞인 토로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분명 오해된 부분이 있고 왜곡된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뭘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부활에 관한 생각이나 믿음을 점검하는 것으로 이 논의의 실마리를 풀어보기로 하자. 

부활의 사실성과 의미의 문제 
만일 누군가를 붙잡고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좀 더 직접적으로, ‘죽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면 어떨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도 않고 돌아설 것이다. 믿는다고 대답할 사람은 기독교인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는다고 대답하는 그 사람더러,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그런 말을 믿을 수 있느냐고 재우쳐 물으면 뭐라고 할까? 모르긴 몰라도 궁색한 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며 한 걸음 물러설 것이다. 
그렇다.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는 바로 거기에 성경이 있다. 그 성경을 놓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이 갈린다. 그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부활이 사실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리를 어떻게 당신들은 믿을 수 있느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훨씬 더 이성적이다. 비록 믿지는 않아도, 그들의 불신앙은 차라리 솔직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앞에서 지금까지 기독교는, 억지를 쓰듯이 그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설득하려고 애를 써왔다. 얽혀든 셈이다. 사실로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어떻게든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왔으니, 우리마저도 그 ‘사실성’에 코가 꿰인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까지의 신학적인 부활 논의에서 이 ‘사실성의 문제’가 피해갈 수 없는 걸림돌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사실이어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라면 문제이다. 그런 사고방식에 의해서 재단될 수 있는 종교나 진리가 아니다. 부활은 깨달아야 할 진리이지, 입증되어야 할 사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신학은, 이러한 실증주의적 사고에 스스로 걸려들고 말았다. 그래서 들고 나선 것이 ‘빈 무덤’이고 ‘목격자들’이다. 예수님의 시체를 묻은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을 본 목격자들이 있었다는, 성서의 기록을 증빙 자료로 사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으로도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은 충분히 입증된다는 식의 논조였다. 한마디로 말해,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부활 신앙은 이러한 발상의 결과물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늘 이것이 안타까웠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부터 부활 논의는 엇나가기 시작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신학을 통해서 ‘부활의 사실성’을 논리적으로 말해도, 그러한 논리는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설사 성서고고학의 힘을 빌려 예수님의 무덤을 발견해낸다고 해도,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목격자들이 있었다고 아무리 강변해도 마찬가지이다. 2000년 전의 그 목격자들을 오늘에 불러와서 증인석에 세우지 않는 한, 부활의 사실성은 계속 의심 받을 수밖에 없다. 부활이 사실이냐고 묻는 물음에 ‘코가 꿰였다’고 심하게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활을 사실로 믿을 수 없다고 버티는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우리마저도 그 ‘역사적 사실’에 걸려든 것이 속상해서 하는 말이다. 이리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실로 믿는다 해도, 그것은 ‘이성에 반(反)하는 믿음’이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것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과거의 부활’로 고착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믿는 자의 현재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부활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활의 현재적 의미’를 논할 때도 영향을 미친다. 그 현재적 의미가 ‘과거의 사실’에 기초하는 한, 그것은 늘 사실성에 의해서 위협받기 마련이다. 그 현재적 의미마저도, 현재의 삶을 떠받쳐 주는 발판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과오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에게는 ‘죽은 자의 부활’조차도, ‘죽은 다음의 일’로 미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죽은 다음에나 있을 ‘미래’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현재적 의미를 말해도, 사후(死後)에나 있을 ‘부활의 미래’를 현실 속에서 ‘희망’으로 품고 사는 정도의 의미일 뿐이다. 
아니, 어렵게 말할 것도 없다. 그냥 소박하게 말해보자.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의 심상에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죽은 자’라는 말만으로도, ‘죽은 예수님’을 떠올리게 되고, ‘죽은 다음의 우리’를 연상하게 되지 않는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죽은 다음에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죽은 다음에 다시 살 것을 믿는다는 정도로, ‘죽은 자의 부활’을 이해하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아무리 현학적인 언설로 부활을 말해도, 신학자들 역시 이런 소박한 발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서구신학자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는 대목에서, 항상 ‘종말론’을 들먹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신학을 배워와 평생을 우려먹으면서 목회자들을 눈 아래로 보는 국내의 신학자들, 그들의 학문적인 교만 또한 딱하기 그지없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 부분에서 이렇게 힘주어 말하는 필자의 어투가 심상치 않게 느껴질 것이다. 까닭이 있다. 20여 년 전에 있었던 아픈 사연이다. 그때 나는, 동료 목회자들 세 명과 함께 3년 동안 교단의 구역공과를 쓰는 필진의 한 사람이었다. 교회력에 따라 52주를 네 명이서 나누어 맡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맡은 부분에 부활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어진 본문에 따라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설교를 썼다. 그런데 그 원고가 인쇄를 앞두고 감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죽은 자의 부활’을 설교하면서 그 ‘현재적 의미’를 말하는 설교의 내용을 그대로는 내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감수위원 중 한 사람이, 누구라고 하면 알만한 구약 학자인데, 그분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신학적으로도 죽은 자의 부활은 ‘부활의 미래’를 말한다.”고 하면서, “강 목사의 ‘사견’(私見)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공적인 공과에는 실을 수 없다.”고 했다. 졸지에 ‘신학을 모르는 목사’가 되어버린 꼴이었다. 그때 나는, 이 나라의 신학자들이 목회자들을 신학적인 대화의 상대로는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확인했다. 그분에게는, 불트만이나 바르트나 몰트만이 말하는 부활은 신학적인 검증을 거친 ‘공적인 견해’이고, 한국의 한 목회자가 말하는 부활은 ‘사적인 견해’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그가 말한 ‘부활의 미래’라는 말이, 지금도 아픈 기억으로 가시처럼 박혀있다. 덕분에, 지난 20여 년 동안 부활을 관심하며 ‘성서가 말하는 부활’을 이해하고자 애쓸 수 있었다. 그 당시의 모멸감을 분발의 계기로 삼아, 이렇게 공적인 지면에 사견(?)을 피력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그분께 감사해야겠다. 
무얼 말하려고 이러는가? 
외국의 신학을 성서적 검증도 거치지 않고 직수입하는(?) 우리네 학문 풍토, 이제는 극복하고 넘어서야 되지 않겠나 싶어 이런다. 더 직접적으로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활의 미래’니 ‘피안의 사실’이니 하면서 해석하는, 그들 해석이 과연 올바른지를 문제 삼고자 이런다. 루터가 교황과 싸울 때도 성서를 놓고 붙었듯이, 모든 신학적 논쟁도 성서 해석의 문제로 귀착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 삼고자 하는 요지인즉 간단하다. 
지금까지의 부활 논의에서는, ‘부활의 현재’가 증발되어 버렸다는 것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믿는 자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부활은, ‘과거’와 ‘미래’만 있고 ‘현재’가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해도, 그건 ‘과거의 부활’일 뿐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해도, 그건 ‘미래의 부활’일 뿐이다. ‘현재의 부활’은 어디로 증발했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 사실’로 믿고, 죽은 자의 부활은 ‘미래의 희망’으로만 믿는다면,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는 ‘부활 신앙’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개인적으로야, 이렇게 믿어도 저렇게 믿어도, 믿음은 믿음이고 믿는 자는 믿는 자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얼마나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고 성서의 가르침에 부합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도 직결된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서가 복음으로 전하는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말하는, 성서의 논리를 다시 살펴보아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 사이의 연관성 문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그런데 성서는, 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죽은 자의 부활’과 깊이 연관시켜 말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말할 때도 있고, ‘죽은 자의 부활’만을 말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저변에 깔려있는 ‘논리적인 연결점’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 우리 같지가 않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로 돌려버리고, ‘죽은 자의 부활’은 ‘미래’로 미루어두는, 우리와는 다르다. 아마도 서로 연관시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엇’이 과연 뭘까? 
필자는 그 ‘논리적 연결점’을, 초대교회 속에서 처음 설교된 ‘부활의 로고스’에서 본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행 2:14-36)가 바로 그것이다. 설교의 요지인즉,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행 2:23-24)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겨냥한 첫 번째 직격탄이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현장인 바로 그 예루살렘에서, ‘죽인 자들의 죄’를 고발하고 ‘죽임을 당한 그분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나 따라다니던 갈릴리 촌놈들(?)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모두가 도망치고 말았던 그들이, 정신이 돌았는지 아니면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이리 담대히 외치고 나섰다. 놀랍지 않은가? 과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바꾸어 놓은 것일까? 다 말하지 않은 그 속에, 앞으로도 계속 말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 
그게 바로 사도행전 2장 4절이 말하는 ‘방언’(‘헤테로스 글롯사’)이다. “마치 불의 혀들(복수; ‘글롯사이’)이 그런 것처럼 혀들이 갈라지면서, 그것들(혀들)이 그들에게서 드러났다.”(행 2:3)는 말속의 그 “혀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어에서 ‘혀’를 뜻하는 ‘tongue’이라는 단어가 ‘말, 언어’라는 의미를 갖듯이, 이 ‘글롯사’(혀)라는 헬라어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달라도 그냥 다른(‘알로스’) 게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헤테로스’라는 형용사를 덧붙였다. 그래서 필자는, ‘방언’이라고 번역된 이 ‘헤테로스 글롯사’를 ‘낯선 말,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읽는다. 우리말 성경이 이 말을 ‘사투리’로 이해하여 ‘방언’(方言)이라고 번역한 것은, 무지에 가까울 정도의 오역이다. ‘방언’이라고 번역될 말은 따로 있다. 사도행전 2장 6절에서 말하는 “디알렉토스”야말로 ‘사투리’요 ‘방언’(方言)이다. 그러니까 ‘디알렉토스’와 ‘헤테로스 글롯사’를 구별하지 못한 번역상의 무지가,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만든 셈이다. 오늘날 교회 속에서 방언을 한답시고 “아따따 우뚜뚜” 하는 종교적 기현상이 생겨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참으로 딱하고 부끄러운 현실이다. 
사도행전을 2장 40절을 보라. 이 ‘헤테로스 글롯사’라는 말이 “헤테로스 로고스”로 달리 말해지기도 한다. 우리말 성경은 이 말도 오해하여, “여러 말”(개역성경, 개역개정판) 또는 “이밖에도 많은 말”(새번역, 표준새번역)이라고 잘못 번역해 놓고 있지만, 사실은 원어 그대로 “낯선 로고스, 다른 로고스”로 이해함이 옳다. 그래야 ‘헤테로스 글로사’와 ‘헤테로스 로고스’ 사이의 의미 연결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저자는, 초대교회에서 설교된 ‘부활의 로고스’야말로 ‘낯선 로고스’였음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부활’이라는 그 ‘낯선 말’을 통역하고 그 ‘낯선 로고스’를 해명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그 ‘낯선 말’의 전형적인 형태가 3장 15절과 13장 30절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이다. 조금씩 변용되어 달리 표현되기도 하지만, 초대교회가 복음으로 전한 ‘부활의 공식문구’이다. 마치 수학 공식과 같은 것이라 여겨도 좋을 정도로,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물론 설교의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 가르치는 초점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지만, 부활에 관한 모든 가르침은 이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첫 절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그 복음을 일깨워주려고 한다”고 했던 ‘그 복음’도 바로 이것이었으리라. 물론 바울도 누군가로부터 전해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자기도 “받아들였던”(고전 15:3) 복음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의 눈으로부터 비늘 같은 것들이 벗겨져 다시 보았다(아나블레포)”(행 9:18)고 한 사도행전의 기록대로라면, 바울로 하여금 그 복음에 눈을 뜨게 한 최초의 사부(師父)는 ‘아나니아’였음이 분명하다. 좋은 선생 뒤에는 이처럼 훌륭한 사부가 숨어 있었구나 싶다. 그런 바울이었기에, 자기가 전해 받은 ‘그 복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일깨워줄 만한 ‘논리적 설득력’도 갖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이 대목에서 ‘논리적 설득력’을 말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바울은 오늘날 우리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면서 억지를 쓰지도 않는다. 그리스도가 부활했으니 ‘죽은 자의 부활’이 진리임을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고전 15:12)을 향해서도, 그들을 설득할 만한 그 나름의 확고한 논리를 갖고 있다. ‘부활의 로고스’가 진정 ‘로고스’라면, 아무리 그것이 “낯선 로고스”(행 2:40)일지라도, 그걸 말하고 가르치며 설교(說敎)할 수 있는 ‘논리’가 그 속에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투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고, 그것을 ‘죽은 자의 부활’과 연결시키면서, 장황할 정도로 자세하게 논급해나간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부활의 공식문구’ 속에 숨겨져 있는 논리, 그 ‘부활의 로고스’를 바울은 정확히 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논리가 뭘까? 
고린도전서 15장 12절 이하에 그 논리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중에서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새번역) 하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자기의 논리를 개진한다. 그런데 그 논리가 우리를 더욱 헷갈리게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죽은 자의 부활’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한다. 우리의 발상과는 전혀 역순(逆順)이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그리스도가 부활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라 싶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고전 15:13, 새번역)라고 말하며, ‘죽은 자의 부활’을 먼저 내세우고, 그것을 논리적 기반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한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식의 과격한 논리이다. 바울이 오늘을 살아 어느 신학대학교수로서 이런 말을 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를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과격하고, 또 과격하게 들릴 정도로 이해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 과격한 논리를 끝까지 견지한다. 심지어, 이런 이해되지 않는 말을 15절과 16절에서 연이어 두 번이나 더 언급하고 있다. 도대체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할 때 그 말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는 식의 이런 논리를 피력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서구신학은, 이 논리의 과격성을 제대로 거머잡지 못한 것 같다. 공부가 짧은 한국의 일개 목사가 ‘서구신학’을 안다면 얼마나 알겠는가. 서구신학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한, 나름으로는 애써 공부했다. 바르트가 쓴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책의 번역본을, 오랜 세월 밑줄을 그어 가며 열 번 넘어 정독했다. 그가 말하는 ‘죽은 자의 부활’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 15장이 말하는 바울의 논리를 바르트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내 나름의 혐의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들 관념철학의 후예들이 말하는 신학적인 언설들이 늘 그렇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모를 정도로 난삽했다. 분명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는 것 같았는데, ‘피안’이니 ‘미래’니 ‘희망’이니 하는 그 신학적인 언설 자체가, 나에게는 공허할 정도의 관념에 불과했다. 내 눈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희망의 신학’을 말하는 몰트만도, 이러한 신학적 계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희망의 신학’을 말하면서도 ‘희망의 윤리’는 쓰지 못하고 후학들에게 남긴다고 말하는, 그 속내가 어렴풋 짐작이 되기도 한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그들과 맞상대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다만 초대교회의 ‘사도적 증언’을 파고들다 보니, 그들 서구신학자들이 말하는 부활 이해에 뭔가 근본적인 오류가 있더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서구신학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한국교회의 신학 풍토와 신앙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성서에 근거한 우리 나름의 ‘부활 신앙’을 새로이 모색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이어갈 이 글의 논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위에서 제기한 부활 신앙의 문제점을 요약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 입증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실로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일 수는 없다. 
둘째, 성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죽은 자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 
셋째, ‘죽은 자의 부활’이 ‘죽은 다음의 일’로 미루어질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러려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이해를 달리할 필요가 있다. 
넷째, ‘과거의 사실’과 ‘미래의 희망’만을 말할 때, 불가피 부활의 ‘현재적 의미’는 증발되거나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고로 부활은, 믿는 자의 삶 전반에 미치는 ‘윤리적인 과제’로 제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지가, 독자들의 부활 이해와 상치되는 부분이 있어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서를 놓고 그걸 해석해나가면서 대화한다면, 그 대화는 우리의 부활 이해를 한결 풍성하게 할 것이고,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 새로운 활기를 더할 것이다. 

강일상 l 목사는 ‘작은 샘’이라는 작은 가정교회의 목사이다. 한국신학대학과 그 대학원을 졸업했다. 설교집으로는 『그 사람, 어느 길로 가더냐』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 있고, 연구서로는 『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와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이 있다.
글쓴이 / 강일상
제목 조회 수
하루 숲 속 생활 뒤 스트레스 측정하자..놀라운 결과 - SBS 1
친한 친구끼리는 뇌파도 비슷하게 나온다…“fMRI로 뇌속혈류 측정비교” - 뉴스웍스 5
[결정비용] 뇌, 사소한 고민에도 에너지 펑펑 "결정할 때마다 피곤해" - 한국일보 16
바나나는 열대에서만 자란다? 아마추어 과학자의 엉뚱한 도전 17
20대 기억력 지닌 80대 '슈퍼에이저' 비밀 밝혀졌다 - newsis 29
국가는 가족에, 가족은 비혼자에 떠넘겨.. '돌봄의 민주화' 고민할 때 - 경향신문 41
스스로 바둑 깨우친 '알파고 제로' 나왔다..'AI 신기원' - 연합뉴스 9
엄마 얼굴 쏙 빼닮았는데… 관상-성격은 왜 다르지? - 동아일보 70
"종교는 인민의 아편"… 과학으로 입증됐다 - 아시아경제 190
슬픈 영화를 보고 나면 유대감이 더 강해진다? - 매일경제 177
불협화음 다음에 들려오는 화음(기독교사상 2016년 7월호) - 허정섭목사 280
영적 웜홀(Wormhole)로 인도하는 안내자(기독교사상 2016년 4월호)- 민돈후목사 278
발레리나 강수진의 완벽은 없다. 171
진정한 스포츠맨쉽 176
행복이란? 212
'한숨' 쉬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일일까? 600
무표정한 당신 '공감 능력'도 떨어진다? 533
잘됐으면 좋겠다 - 홍대광 383
메멘토 모리, 죽음이 삶에게 건네다 562
요즘 엄마의 충고 503
백만장자의 내려놓음 575
|인물| 김교신 756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일상성 속의 증거'로서의 신앙 - 양현혜교수(기독교사상 2015년 5월호) 1177
그 중에 그대를 만나 - 이선희 1147
남을 위해 기도하면, 화병이 사라진다. - 다음뉴스 2949
바램 - 노사연 2935
또 운다 또 - 다비치 2908
사랑없인 못 살아요 - 조영남 1220
오드리햅번이 아들에게 남긴 교훈 1341
기개(氣槪)를 잃지 마라! 1270
[재야인사] 계훈제선생 1753
Che gelida manina! - 오페라 라보엠 中 1244
부활, 무엇이 문제인가? - 강일상목사 (기독교사상 2011년8월호) 1963
이국주(개그우먼) 1850
심명보(화가) 2374
월리엄 셰익스피어 1639
나이의 역사 1711
공자 1651
죽기 직전에야 후회하는 다섯 가지. 2631
마이클 조던 2168
톨스토이 1727
윌슨 미즈너 2192
발타사르 그라시안 1811
공자 1676
로알 아문센 1686
마더 테레사 1688
프란치스코 교황 1614
원스턴 처칠 1943
죽은 시인의 사회 中 1624
피에르 코르네유 2153
현대인에게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 1602
Angelo Branduardi - La grande giostra 1663
모든 사람은 이것이든 저것이든.. 1760
인간의 삶 1554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 해바라기 1657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 김광석 1632
겨울은 내 머리 위에 1768
인간의 생명은 둘도 없이 귀중한 것인데도.. 1783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 최진석교수 1702
축의금 1만3천원과 사과 한봉지 3019
타인의 단점을 찾으려고 한다면 1731
가장 외로운 사람이... 1616
다시 보는 영화 "괴물" - 출처:외방정원(http://oeker.net/) 2212
초현실주의 작가 블라디미르 쿠쉬 작품감상 [27] 7769
지식에 투자하는 것 1708
번아웃 증후군 자가진단 1751
돈은 머리에 넣고 다녀라 1871
자신을 내보여라. 1655
지도자의 책임 1756
의과대학 교수들이 만든 의학 만화 6527
나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1722
이직률 50%의 회사 1817
이 세상에 열정없이 이루어진 위대한 것은 없다.-게오르크 빌헬름 2021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신호 1919
장작 2026
"매출증대비법서" 中 1995
중용 제23장 2171
불가능이란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불가능이 없다. 2057
易地思之 2029
천 개의 바람이 되어 2042
인간을 바꾸는 3가지 방법 2030
急難之朋 2034
남편의 얼굴, 아내의 마음 2037
한국군과 미군의 차이 2260
국민학생과 초등학생의 차이 2342
한국에서 여객선을 안전하게 타는 법 2232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2320
운명의 수레바퀴는 존재하는가? 2346
도마복음의 진실 (+ 한글번역) [3] 6046
XE Login